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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7 (일)

    이슈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자백

    “바지사장 말고, 진짜 책임자 불러 와”…아리셀 판결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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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아리셀 참사’ 1주기인 지난 6월24일 오전 유가족들이 경기 화성 서신면 참사 현장에서 추모제를 열어 화재가 발생한 아리셀 공장 건물 앞에서 눈물 흘리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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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3일 수원지법은 최악의 화재참사로 파견노동자 등 26명을 숨지게 한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 부자에게 나란히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해당 판결은 경영책임자에 대한 엄벌뿐만 아니라, 2021년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처법) 제정 이후부터 기업들이 모호하다고 주장해왔던 경영책임자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이른바 ‘바지사장’처럼 권한 없는 대표이사나, 대표이사만큼 권한이 없는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시에스오)는 경영책임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5일 수원지법 형사14부(재판장 고권홍)의 아리셀 사건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중처법의 경영책임자의 개념에 대해 8쪽에 걸쳐 설명했다. 중처법은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하 사업총괄책임자)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하 안전보건업무책임자)”을 경영책임자로 보고, 종사자에 대한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를 처벌한다. 재판 과정에서 박순관 대표이사는 경영책임자가 자신이 아니라 아들 박중언 본부장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가 긴 분량을 할애해 경영책임자의 개념을 설명한 이유다.







    “바지 사장 내세운 뒤 실질적 권한 행사하는 자 처벌해야”





    재판부는 “안전·보건에 관한 의무를 실행할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를 경영책임자등으로 보아 처벌하는 것”이 중처법의 입법 취지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대표이사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며 제3자가 실질적으로 대표이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에 명목상 대표이사를 경영책임자등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고, 오히려 명목상 대표이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뒤에 숨어 회사를 장악하며 실질적으로 대표이사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를 처벌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어 “형식상의 직위나 명칭에 관계없이 실질적으로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안전보건 확보의무 이행에 관한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진다고 볼 수 있으면 사업총괄책임자로서 경영책임자에 해당한다”며 그 판단기준으로 “직무, 책임·권한,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기준은 기업 ‘총수’ 또는 ‘대주주’인 경영자들이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하면서도 중처법에 따른 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사례 등에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 역시 ‘중처법 1호 사건’이라 불리는 삼표산업 채석장 매몰 사망사고와 관련해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을 경영책임자로 봐 기소한 사례가 있다. 당시 검찰은 정 회장이 사고현장의 채석 방식을 최종결정하는 등 사업에 관여해왔고, 안전보건업무에 대해서도 실질적·최종적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대표이사가 아님에도 기소했다.



    다만 재판부는 “대표이사가 경영에 대한 어떠한 권한을 실제로 전혀 행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도 있지 않아, 명목상 대표이사에게 중처법상 작위의무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 한해 대표이사가 아닌 제3자를 경영책임자등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대표이사와 동등한 권한 없는 CSO, 경영책임자 될 수 없어”





    중처법 제정 이후 기업들은 시에스오를 선임한 뒤, 시에스오가 ‘사업총괄책임자에 준해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경영책임자(안전보건업무책임자)라고 주장해왔다. 재판부는 이에 대한 기준도 설명했다.



    재판부는 ‘안전보건업무책임자’를 “안전·보건에 관한 조직·인력·예산 등에 관해 대표이사 등 사업총괄책임자에 준해 전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등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사람”이라며 “안전·보건에 관한 최종 결정권이 대표이사에게 있고, 대표이사의 권한과 동등한 수준으로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면 안전보건업무책임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시에스오가 경영책임자에 해당하려면, 안전·보건에 권한이 대표이사와 동등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안전보건업무책임자가 존재하는 경우,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대표이사 등 사업총괄책임자와 함께 처벌되는지, 안전보건업무책임자만 처벌되는지도 논쟁거리였다. 재판부는 “안전보건업무책임자가 선임돼있는 경우 사업총괄책임자는 경영책임자등에 해당하지 않아 면책된다”면서도 “안전보건업무책임자가 선임돼있다 하더라도 개별적인 사건에서 문제가 되는 안전보건에 관한 최종적 결정권을 사업총괄책임자가 행사한 경우에는 사업총괄책임자를 경영책임자로 봐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가 밝힌 경영책임자 판단 기준은 중처법 시행 즈음 나온 대검찰청과 고용노동부의 중처법 해설서 내용과 상당부분 유사하다. 다만 법원이 판결을 통해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한겨레에 “이번 판결은 중처법 문언과 입법취지에 비춰 당연한 해석”이라며 “실질적인 경영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해선, 근로감독관 등이 수사 역량을 키위 ‘오너’든 ‘대표이사’든 그들이 경영책임자에 해당한다는 증거를 얼마나 잘 수집하고 법관을 설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신하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도 “재판부는 조직·예산·인력에 대해 대표이사만큼 자율성이 있어야 경영책임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는데, 이러한 수준의 시에스오는 상정하기 힘들다”며 “시에스오를 앞세워 책임을 회피하려는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본다”고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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