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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7 (일)

    이슈 일본 신임 총리 기시다 후미오

    ‘식민지배 첫 사죄’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 별세…향년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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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무라야마 토미이치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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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를 남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17일 101세로 별세했다.



    사회당 대표였던 무라야마 전 총리는 지난 1994년 4월 자민당 및 사키가케 양당과의 연정을 구성해, 1996년 1월까지 81대 총리로 재임했다. 사회당으로서는 47년 만의 총리였다.



    일본 평화헌법 수호와 평화 노선의 주창자였던 무라야마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 문제와 연관된 과거사 문제 해결에 매진해, 한국 등 인근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그는 95년 2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해, 위안부 문제 해결과 보상을 매듭지으려 했다.



    같은 해 종전 50주년 기념일인 8월15일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성과 사과를 담은 역사적인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멀지 않을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잘못하고, 전쟁으로의 길을 걸어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지게 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고 인정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담화의 문구는 일본 정상의 가장 전향적인 사죄로 평가 받았다. 그의 담화는 또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침략”으로 규정하는 진전된 역사 인식을 보였다. 다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무라야마는 집권을 위해 현실적 타협도 했다. 그는 사회당의 종래 ‘평화·호헌’을 전환해, ‘자위대 합헌, 미-일 안보조약의 유지’ 등을 내세웠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에서도 기지 용지 강제 사용에 서명하기도 했다. 1996년 1월 총리직에서 내려온 그는 사회당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초대 대표로 취임했다. 2000년 6월에 정계를 은퇴한 그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노력해 아시아여성기금 이사장을 맡았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 문제는 이미 한-일 청구권 협정 등 과거 합의로 해결됐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모금을 추진했다. 그는 1999년에 초당파 방문단 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이타 현의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무라야마는 메이지대의 전신인 메이지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뒤 어민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운동과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오이타현 서기로 일한 뒤 시의회, 현 의회를 거쳐서 1972년에 오이타에서 중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됐다. 그 후 8선을 거쳤다. 1991년 당 대회에서 국회대책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당 지도부로 활동했다. 그는 자민당 정권이 추진한 자위대를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파견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 협력법안을 저지하려고, 의사일정을 늦추는 이른바 ‘우보(소걸음)전술’로 대응해 유명해졌다.



    자민당 장기집권을 종식한 지난 1993년 8당파 연립인 비자민·호소카와 정권 당시에 사회당 위원장으로서 연정 유지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94년 비자민당 소수 정당들이 뭉쳐 만든 하네다 쓰토무 연립정권을 이탈해 64일 만에 붕괴시키고는 자민당 및 사키가케와의 연립정권을 탄생시켜 자신이 총리로 취임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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