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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이슈 시위와 파업

    임신중지·출산 파업·여성 군복무…이슈파이팅 최전선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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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2003년 봄호에 실린 특집 ‘여자, 군대를 말한다’, 2002년 겨울호에 실린 특집 ‘아이 낳기 싫다’에 들어갔던 난나 작가의 일러스트. 이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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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네번째 편집장을 맡았던 나는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에서 공부하며 페미니즘 대중화의 수혜를 고스란히 입은 세대였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는 차별적 법·제도와 싸웠고, 대학에서도 총여학생회와 여학생운동단체가 조직되어 학내 여성문제를 논했다. 각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어 인기를 끌었고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신촌의 성정치 운동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2000년 전후로는 서울여성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으며, ‘지하철 쩍벌남’ 문제 등을 공론화한 ‘돌꽃모임’이나 대학 내 예비역 문화를 비판한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 등 영페미니스트 그룹들도 등장했다.



    나는 대학 4학년 때 여성학을 수강하면서 요즘 말로 ‘빨간 약’을 먹었는데, 뭔가 불편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던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직시하게 되었다. 세상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분명했다. 내게 빨간 약을 내민 저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십대 초반의 여성에게 페미니스트란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어낸 ‘힙’한 시대인이었던 것이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멋진 선배가 또 있었으니, 그가 이프의 2대 편집장 황오금희다. 재미있는 여자들 모여 있는 데 가 볼래, 라는 선배의 권유로 처음 이프 독자 모임에 참여했다. 서울 대학로의 호프집에 한 무리의 떠들썩한 여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페미니스트 잡지 발간 9년’이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가능하게 했던 최대 주주들, 정기구독자였다.



    그렇게 ‘이프인’에 합류한 것이 1999년이었다. 처음 편집회의에 참석했을 때, 놀랍도록 아름답고 급진적이며 자유분방하고, 심지어 웃기기까지 한 유숙열, 김신명숙, 엄을순, 박미라, 제미란, 권혁란 등 선배들의 기세에 눌려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회의는 사무실에서 시작해 호프집으로 이어졌고, 동네를 바꿔 더 독한 술을 파는 곳으로, 해장을 하면서 다시 술에 취하는 국밥집까지 끝나지 않았다. 창간 멤버에 이은 이프 2세대로서 서서히 저 세상 텐션에 물들어 갔고 객원기자로 시작해 기자와 편집장을 거쳤다.



    이프가 유쾌함을 지향한다고 해서 일을 설렁설렁한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특집을 기획하고 인터뷰할 인물을 정하는 편집회의는 치열했다. 이프를 만드는 일은 이슈파이팅의 최전선에 있다는 뜻이었고, 그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즐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이프인들은 때론 거칠었고 때론 냉정했으며 늘 과감했다. 발간될 때마다 다른 언론에 기사화될 만큼 화제 만발이었던 이프의 탁월하고 예민한 시대 감각! 그건 페미니즘이라는 선명한 관점과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편집 기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잡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성인 우리 자신을 위해 특집을 기획했고 글을 썼다. 내가 웃고 뒤집고 놀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여자들이 모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프에 몸담으며 ‘이제 낙태를 말한다’(2001년 봄), ‘여자도 더러워져야 한다’(2002년 가을), ‘아이 낳기 싫다’(2002년 겨울), ‘여자, 군대를 말한다’(2003년 봄), ‘할머니의 힘’(2004년 여름), ‘여자에게 밤을 허하라’(2004년 가을) 등의 특집을 만드는 데 함께했다.



    이프는 창간 때부터 낙태(임신중지), 오르가슴, 자위, 성적 환상 등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지금으로서도 급진적인 이슈를 특집으로 다루어왔다. 2019년 낙태죄 위헌 판단이 나오기 훨씬 전으로, 2001년 당시 불법이었던 낙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낙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또 성과 재생산 담론의 전장이 된 몸의 경험을 여성 스스로가 발언하겠다는 조용하지만 뜨거운 실천이었다. 이프는 그렇게 안전한 임신중지권의 사회적 쟁점화에 불을 지폈다.



    2002년의 특집 ‘아이 낳기 싫다’는 이프 이슈파이팅의 힘을 보여준 레전드라 할 만하다. 공교롭게도 그 호의 표지 인물은 세계적 여성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었다. 스타이넘의 환한 미소 아래 ‘특집 아이 낳기 싫다’ ‘출산 파업,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이 함께 실린 표지는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당시 권혁란 이프 편집장은 미래의 출산율을 좌우할 여자 대학생들의 출산·육아의식에 관한 설문조사를 할 것을 제안했고 634명의 응답 결과는 놀라웠다. ‘결혼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57.3%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을,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묻는 말에는 66.6%가 ‘있다’는 응답을 했다. 무려 23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프가 저출생을 국가의 중요한 현안으로 밀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한겨레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2003년 봄호에 실린 특집 ‘여자, 군대를 말한다’에 들어갔던 일러스트레이터 난나 작가의 만화. 이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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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음으로 화제를 몰고 온 특집은 2003년 ‘여자, 군대를 말한다’이다. 1999년 헌법재판소가 군가산점 제도 위헌 결정을 내린 뒤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가 극에 달했다. 이프는 여성을 향한 분노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며, 문제는 남성만을 징집 대상으로 삼는 국가 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유숙열 편집위원은 ‘여자도 군대 보내라!’는 글을 통해 “징병제건 모병제건 병역의무를 남녀 함께 지자”고 제안했다. 병역의무에서 배제된 여성이 ‘입틀막’ 당하면서 영원한 이등시민이 되느니 차라리 국민의 의무를 지면서 권리를 말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호가 발간된 뒤 이프 누리집 자유게시판에 비난 글이 쇄도하다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편집실 전화가 불이 났다. 군대가 한국 사회 남성성에 끼친 영향에 비판적인 이들과 군대를 남성성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는 집단 모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화제의 중심에 국방부 산하의 여군발전단 기사도 있었다. 나는 2700여명 여군의 구심점으로 2001년에 창설된 여군발전단을 거의 육해공군을 통틀어 백통에 가까운 전화 끝에 취재에 성공했다. “이프 너무 센 데 아니에요?”(그런가요?) “지난번 특집이 ‘아이 낳기 싫다’던데 만나기 부담돼요.”(이런 하필이면!) 첫 통화에서 이런 반응을 보였던 세명의 소령은 인터뷰 내내 다소 긴장한 듯 보였지만,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여성으로서의 차별 인식, 전문가로서의 자존감으로 무장한 최고의 여성들이었다. 기사가 나가고 많은 언론사에서 여군발전단을 취재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는 후문을 전해 들었다. 군대 내 성차별에 대한 여군들의 인식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한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여군발전단 중 한분이 말해 주었다. 나는 특종을 한 셈이었다.(촉 좋고 성실한 기자에게 축복 있으라!)



    이프에서 잡지를 만들던 때를 돌이켜보니 한국 사회가 변화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가늠하게 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 여성혐오를 낱낱이 까발린 ‘여성에게 밤을 허하라’에 실린 글들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라떼는’ 군대 특집을 내보낸 뒤 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밤길 조심하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 “에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했다. 만약 지금 그런 메시지를 받는다면, 정말 우리는 길 가다가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떨 것이다. 남혐 일러스트를 그렸다는 오해로 일자리를 위협당하고, 정말이지 순전히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당하는 사회에서 여자들은 살고 있다. 이런 현실에 맹렬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펜, 그리고 관점, 거기에 꺾이지 않는 마음. 그렇게 여자로 살아낸 경험을 풀어내다 보면 오래전 이프 독자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나: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어요?



    독자: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죽는 것보다 낫지 않냐며 그는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이해했다.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생존의 선택지, 나를 질식시키는 것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선택. 그러니 살고 싶은, 축복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면 어찌 아니 그럴 수 있는가.



    오래전 무명의 독자가 축복처럼 살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한겨레



    정박미경 | 이십대 중반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를 만나 기자와 편집장을 거쳤다. 이프 완간 이후 소설가로 등단해 조선 무녀의 역모를 다룬 소설 ‘큰비’와 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고양이의 집사 간택에 얽힌 비밀을 소재로 한 ‘묘묘탐정: 그냥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이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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