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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7 (일)

    이슈 세계와 손잡는 K팝

    “아이돌이 치근덕” “노예 취급”... K팝 산업 노동자가 겪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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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컬처]

    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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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티스트가 먼저 찝쩍대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저희는 그걸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한 상황이에요. 아티스트가 저희를 싫다고 하면 바로 교체가 되거든요. 저희한테 이런 행동을 해도 잘못된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본인의 사생활을 갑자기 오픈한다든지, 현장에서 본인의 성경험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요.”

    K팝 업계에서 2년 동안 일한 20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이야기다. K팝이 글로벌 흥행을 이어가고, 아이돌 산업 시장이 커지면서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도 늘어났지만 우리는 그동안 화려한 스타의 모습에만 주목해왔다. 그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 밤낮없이 뒤에서 ‘서포트’하는 K팝 산업 노동자들은 어떤 현실에 처해 있을까.

    ◇”아이돌 신발을 신겨드려야 하는데,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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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주최한 ‘K팝 이면의 노동을 조명하다’ 토론회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 29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가 공개됐다. 방송 작가부터 스타일리스트, 매니저, A&R(음반 제작) 종사자 등 다양한 직종의 면접자들은 익명을 토대로 자신들이 겪은 K팝 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했다.

    이들 중 절반은 아티스트에게 소위 ‘갑질’을 당했거나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 피해를 겪었다고 언급했다. 5년 차 스타일리스트는 “아이돌에게 제가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기려고 하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빨리 신기라’고 하더라. 다리를 좀 들어줘야 높은 굽을 신기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제가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1년 차 매니저는 “어떤 배우를 만나느냐에 따라 업무 강도가 천지차이”라며 “처음 시작했을 때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재밌게 일했는데, 그 이후 연령이 높은 선배님들을 만나면서 업무 강도가 확 올라갔다”고 했다. 그는 “노예 취급하는 것처럼 대했다”며 “기분에 따라서 저한테 욕 같은 것도 기본적으로 했다”고 털어놨다.

    아티스트를 상대하는 종사자들은 흔히 말하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평소에는 잘해주던 이들도 음반 제작이나 연기 등 작품 활동에 돌입하면 예민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부정적인 감정을 옆에 있는 사람에게 표출한다는 것이다.

    1년 차 스타일리스트는 “아티스트는 자기가 뭔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밤 11시에도 전화해 ‘이렇게 입게 준비해 달라’고 한다”고 했고, 3년 차 A&R 종사자는 “아티스트가 새벽에 일하니까 우리도 새벽에 일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계속 연락 온다”고 했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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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주체로 열린 '화려한 K팝 산업, 이면의 노동을 조명하다' 토론회.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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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아티스트만 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니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연예인과 함께 일한다’는 이미지가 있어 매력적인 직업으로 인식된다. 이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기에 인력의 대체 가능성을 전제로 한 불합리한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센터는 지적했다.

    스타일리스트의 경우 정말 대우가 좋지 않은 곳에서는 신입에게 월급 120만원을 주는 곳도 있고, 공연이 임박한 시점에는 새벽 2시에 회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큰 프로젝트가 있는 때에는 두 달 동안 매일 새벽 3시에 퇴근하지만 성과급은 없다고 했다. 아티스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기에, 아무리 열심히 일했더라도 아티스트에게 이슈가 생기면 자신의 성과 또한 낮아지기 때문이다.

    9년 차 A&R 종사자는 “부조리함을 다들 겪으면서도 아이돌 옆에 붙어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상사가 욕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옆에 있어야 되니까 참고 다니니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했다.

    ◇”제2의 BTS는 없다…블랙핑크 뮤비는 10억원, 작은 곳은 1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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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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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접 조사자 29명 대부분은 ‘제2의 방탄소년단’ 탄생에 회의적이었다. 또 다른 글로벌 아이돌 스타가 등장할 가능성은 있지만, 빅히트뮤직처럼 소규모 기획사에서 제작한 아이돌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리한 환경이라고 했다.

    9년 차 A&R 종사자는 “옛날에는 작은 회사에서도 인피니트 같은 그룹이 나왔지만 이제는 힘들어졌다”며 “지금 K팝 구조상 이제는 BTS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블랙핑크는 뮤직비디오에 10억원을 쓰는데 다른 곳은 1000만~5000만원을 쓴다. 퀄리티가 다르다”고 했다. 또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자체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도 몇십억 원이 드는데, 투자한 만큼 인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음반 제작비가 SM엔터테인먼트와 다른 곳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며 “이제는 가난해도 성공한 아이돌을 만든다는 건 힘들어졌다”고 진단했다.

    ◇”사회적 공론화 통해 정부 지원과 대책 마련해야”

    이종수 노무법인 화평 대표는 최저 시급 미달, 장시간 노동, 괴롭힘 발생 등을 막기 위해 “K팝 산업에 특화된 정기 실태 조사를 통해 열악한 노동 환경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정부의 지원과 대책 마련을 불러와야 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영화 산업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20년 전만 해도 영화 스태프들 역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무보수 초과 근무 등에 시달렸다”며 “매년 실태 조사를 통해 이를 막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고 했다. 현행 영화비디오법에서는 표준 보수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적시한 표준 계약서를 사용하도록 하며 임금 체불이 있을 경우 정부의 지원을 막는 등 강력한 조치가 취해진다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이 대표는 “K팝 업계 차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율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참여하는 노사정 협의 기구 설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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