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이윤희의 '안경을 쓴 가을'의 한 장면. 창비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발히 활동 중인 이윤희 작가의 데뷔작 '안경을 쓴 가을'이 10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표지에는 가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낙엽이 흩날리는 길 위, 소년과 강아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 있는데, 사람처럼 두 발로 꼿꼿하게 선 강아지의 천연덕스러운 자세가 벌써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이 강아지의 이름이 '가을'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분주한 아침. 엄마, 아빠, 누나는 부랴부랴 직장으로, 학교로 향한다. 얼마나 바쁜지 가을이에게 인사 한마디도 없이 쌩 지나쳐 간다.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비로소 가을이의 하루가 시작된다.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집을 정리하고, 먹을 것도 챙겨 먹는다. 형 방에서 보드게임을 발견해 설명서를 읽고 있는데, 숨어 있던 형이 갑자기 나타난다. 형은 게임을 하는 가을이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너 말할 줄 아는 거 다 알아." 당황한 가을이에게 형이 제안한다. "비밀은 지킬게.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내가 되어 줘." 그리고 형은 집을 나간다.
형이 주고 간 안경을 쓰고 형의 옷을 입자 놀랍게도 모두 가을이를 형으로 알아본다. 가을이는 그렇게 형의 자리를 대신하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처음으로 엄마와 시장에 가서 어묵을 먹고, 학교에 가서 졸린 눈으로 수학 수업을 듣고, 조그마한 앞발로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린다. 형이 돌아올 때까지 임무를 잘 수행해야 하는데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가족들은 가을이가 없어진 줄 알고 애타게 찾아다닌다. 사라진 건 형인데,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형은 언제 오는 걸까.
안경을 쓴 가을·이윤희 지음·창비 발행·232쪽·1만7,000원 |
형의 자리에서 좌충우돌하는 가을이의 이야기와 함께 다른 여러 이야기가 포개어 진행된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무작정 집을 떠난 형의 여정, 골목을 자유롭게 오가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길고양이 ‘겨울’의 시선, 오후 네 시의 티타임을 즐기는 비숑, 외롭고 괴팍한 노인과 유기견의 조우까지. 따뜻하고 웃기고 또 쓸쓸한 이야기들이 맞물리는 동안 계절은 깊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가고 겨울과 함께 형이 돌아온다.
이 작품은 사람 행세를 하는 강아지의 능청스러움으로 시작된다. 귀엽고 유머러스한 장면을 보며 쿡쿡 웃다 보면, 어느새 서사가 깊어지며 여러 삶의 얼굴이 드러나고 마음이 묵직해진다. 형은 길 위에서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가을은 형의 자리에서 그의 마음을 생각한다. 집 강아지 가을이 바깥으로 나가고 길고양이 겨울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이야기는 서로의 자리를 살펴보고 대신해보는 존재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집에 돌아온 형은 어딘가 조금 성숙해진 것 같다. 이제 엄마도 집을 나설 때 반려동물에게 인사를 건넨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가 찾아온 계절이다.
미깡 만화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