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7 (일)

    [투데이 窓]노동법, 보호와 남용 사이의 문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머니투데이

    양지훈 변호사



    유명 베이커리에서 일하던 26세 청년이 주 80시간이 넘는 노동 끝에 회사 숙소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 전날 15시간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일했다고 한다. 회사는 근무기록이 없다며 유족의 과로사 주장을 부인하고 지문인식기 오류를 이유로 출퇴근자료 제공 역시 거부했다. 며칠 전 회사가 유족과 극적으로 합의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의문이 남는다. 목숨을 잃기 전 청년은 일을 시킨 상사에게 "못 하겠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을까.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건을 얼마 전에 들었다. 한 회사에서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 사례인데 상사의 업무지시를 거부한 직원과 관련된 일이다. 상사가 사무직원에게 행정처리를 지시했지만 "왜 제가 이 일을 해야 하나요"라고 되물으며 업무수행을 거부했다고 한다. 애매한 규정을 사유로 상사가 지시한 업무는 자신이 담당하는 직무범위 밖의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시는 합리적이었고 업무수행을 거부한 것이 부당해 보였다.

    두 사례는 한국 작업장 현장의 극단을 보여주면서 이를 마주한 노동법의 가장 어려운 과제를 드러낸다. 노동법은 어떻게 약자를 보호하면서도 그 보호가 무기가 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

    근로기준법 제53조는 주52시간 근로시간 상한제를 규정했다. 하지만 베이커리 사건의 현장에서 이 법조문은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했다. 심지어 근로자가 사망한 건에서도 회사가 근로시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근로자가 카카오톡 대화와 교통카드 기록으로 자신의 노동을 증명해야만 했다. 사용자와 노동자간 힘의 차이가 명백히 보인 장면이다. 이때 근로기준법 제53조가 근로자에게 지시된 노동을 거부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될 수는 없었을까.

    두 번째 사례에선 같은 법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상사의 정당한 업무지시를 부하가 거부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한 장면을 돌이켜보자. 괴롭힘 신고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이 규정한 권리의 행사였지만 상사의 지시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에 해당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일단 근로자의 신고가 접수되면 그것의 진위와 관계없이 괴롭힘 신고에 따른 사용자의 의무이행이 요구된다. 괴롭힘 신고를 접수한 경우 지체없이 당사자를 대상으로 그 사실확인을 위해 객관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하고 후속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나의 판단과 같이 부하가 업무수행을 회피하기 위해 이 제도를 악용한 것이라면 조직에 어떤 해악을 끼칠까. 정당한 업무 지시를 한 관리자를 징계한다면 그 사이 조직에는 '업무를 섣불리 지시하면 괴롭힘 신고를 당한다'는 인식이 퍼진다. 누구도 업무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조직의 기강이 무너질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는 2019년 도입돼 많은 피해자를 구제했지만 일부에선 '업무를 회피할 기회'나 '보복'의 수단으로 남용된 것도 사실이다. 제도의 본래 취지인 약자보호가 아니라 정당한 업무수행을 방해하는 도구가 돼버린 것이다.

    전통적으로 노동법은 '근로자는 약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법이 적용되는 장면들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 속에 있다. 노동법의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어떤 노동자는 말할 수 없는 약자고, 어떤 근로자는 제도를 활용할 줄 아는 전략적 행위자다.

    법률은 작업장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주는 만능키가 아니어서 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다른 법의 운명처럼 노동법 조문들이 모든 현실사례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결국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으로 돌아와 문제를 차분하게 봐야 한다. 우리가 작업장 내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일반적 상식으로서 '노동법 감정'을 함께 합의할 수 있다면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양지훈 변호사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