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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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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가까이 장막에…오윤의 테라코타 벽화 ‘평화’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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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대가인 작고 작가 오윤(1946~1986)과 오경환 작가가 1974년 만든 테라코타 벽화 ‘평화’의 현재 모습. 당시 서울 종로4가 상업은행은 현재 우리은행 금융센터가 됐다. 벽화 표면이 계속 떨어져내리자 은행 쪽은 지난해부터 검은빛 차양막으로 가려놓았다. 차양막 뒤로 벽화의 형태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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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답하고 우울합니다. 작품을 장막으로 덮은 지 2년이 다 돼가는데 전혀 진척되는 게 없으니….”



    오경환(76) 작가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51년 전인 1974년, 그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대가이자 선배인 작고 작가 오윤(1946~1986)과 합심해 만든 서울 종로4가 옛 상업은행 지점(현 우리은행 금융센터) 외벽의 테라코타 벽화 ‘평화’의 처연한 현실 때문이다. 건물 1층의 사다리꼴 모양 전면부에 가로세로 30㎝, 두께 3㎝ 전돌 1천여개를 붙여 만든 이 벽화는 지난해 1월 매연과 풍화로 윗부분 돌출부 조각들이 계속 떨어지는 박락 현상이 심해지자 은행 쪽이 안전을 위해 암갈색 가림막을 치고 공개를 차단했다. 이는 넉달 뒤 한겨레 보도(2024년 5월27일치 26면)로 처음 알려졌다. 그 뒤로 보수·복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장막에 가려진 채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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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대가인 작고 작가 오윤(1946~1986)과 오경환 작가가 1974년 만든 테라코타 벽화 ‘평화’의 현재 모습. 당시 서울 종로4가 상업은행은 현재 우리은행 금융센터가 됐다. 벽화 표면이 계속 떨어져내리자 은행 쪽은 지난해부터 검은빛 차양막으로 가려놓았다. 차양막 뒤로 벽화의 형태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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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작가는 1년 넘게 우리은행 쪽과 보수·복원을 위한 협의를 벌여왔다. 공식적으로 네차례 만나 수리 방법과 비용에 대해 의견을 나눴으나 견해차가 커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논의는 사실상 늪에 빠진 상황이 됐다고 한다.



    오 작가는 세계적으로 역량을 인정받는 프랑스 수복기관에 벽화 보수를 맡기고 여벌의 테라코타 벽돌까지 만들어 지금 자리에 다시 부착해 보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비용이 4억~6억원대라는 점이 쟁점이 됐다. 은행 쪽은 외부업체에 자문한 견적액수인 1억원대 이상을 들이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오 작가는 최소 3억원 이상을 투입해야 온전한 유지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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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상업은행 시절 벽화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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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쪽은 벽화의 박락을 막는 응급 조치를 하고 아크릴 투명 패널로 벽화 바깥을 보존하는 선에서 이후 기증 또는 위탁 관리를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기본적인 보수·복원 방향 자체를 두고 오 작가와 의견을 좁히지 못해 앞으로 관리 방안은 운도 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협의가 벽에 부딪히자 오 작가는 관할 종로구청에 미관 차원에서 해법을 요청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중재를 구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70년대 이렇다 할 개인전을 하지 않은 무명의 존재였던 오윤에게 우리은행 벽화는 자신의 역량을 처음 세상에 내뿜은 공식 데뷔작이었다. 기묘한 기하학적 입면에 누운 사람이 구름과 하늘을 배경으로 떠가는 듯한 벽화의 표면은 올록볼록한 요철의 곡면이 특징이다. 정교하게 곡률이 계산된 평면이면서도 질감의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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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오윤 작가. 한겨레 자료사진


    무엇보다 벽화의 도상이 197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군을 제대한 오윤이 신라 고도 경주의 유산을 접하면서 신라 미술을 널리 섭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미술의 다기한 면모를 작가 의식 속에 내면화하고 여기에 1971년 충남 공주 백제 무령왕릉 고분의 발굴로 백제 미술의 감수성까지 내화시킨 그는 경기도 벽제에서 전돌 공장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을 벌였고, 그 결실로 당시 상업은행 동대문 지점(현 우리은행 금융센터)과 구의동 지점의 내외 벽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한국 대도시 도심에서 지금도 유일한 테라코타 전돌로 만든 대형 공공미술 작품이란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도 지대하다. 이 땅 현대미술사와 공공미술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명작으로, 제작한 지 50년이 지나면서 갈수록 그 가치와 의미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머지않은 장래에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이 미술 유산이 여전히 빈사 상태에 처했다는 것은 역설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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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윤 작가가 벽화 작업을 앞두고 연필로 그린 여러 밑그림들. 오윤 20주기 도록에 실린 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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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1990년대 민중미술 진영의 평론가로 활동했고 오윤의 작품에 대한 평글을 쓰기도 했던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소유주인 은행 쪽의 결자해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삶의 고뇌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1980년대 리얼리즘미술운동의 서막을 열어젖힌 기념비적 작품이 오윤의 벽화”라며 “공공유산적 가치가 지대한 작품인 만큼 은행 최고경영진 차원에서 벽화 보존과 관리 문제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대안을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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