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부산외국어대 글로벌미래융합학부 교수 |
가을의 일반계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고요하다. 교실에서 교사는 자습을 감독하고, 학생들은 묵묵히 문제집을 펼쳐 수능을 준비한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수시 원서를 접수한 학생 중 상당수는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이 없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지원해 굳이 수능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다. 어떤 학생은 면접을 준비하고, 어떤 학생은 태블릿을 보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잔다. 교사는 그런 학생들을 깨우지 않는다. 일부 교사는 노트북을 꺼내 밀린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가르침은 멈추고, 관리와 행정만 남은 교실이다.
대부분의 고교는 3학년 1학기까지 모든 진도를 끝낸다. 2학기에 들어서면 새 수업은 거의 없고, 수능 대비나 면접 준비로 시간이 흘러간다. 교육과정은 명목상 유지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입시 대기 상태’에 가깝다. 교사는 수업 계획안을 제출하지만, 실제 교실에서는 자습만 감독한다. 학생과 교사 모두 교육의 의미를 잃은 채 하루를 ‘견디고’ 있다.
이 풍경은 단순한 입시철의 모습이 아니다. 제도적 불일치가 낳은 구조적 문제다. ‘3월 입학, 2월 졸업’ 체계는 오랜 관습이지만 현행 대입 일정과 맞지 않는다. 수능은 11월 중순에 치러지고, 대학별 수시 면접은 수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때문에 고3이 되면 2학기 대부분이 ‘수능 대비’ 혹은 ‘대기 기간’으로 채워진다. 법적으로는 수업 일수를 채우지만, 교육의 본질은 이미 실종된 상태다. 매년 학생 수십만 명이 한 학기를 ‘시험 대비용 자습’으로 보내고, 수많은 교사가 ‘감독자’로 머무는 현실은 국가적 낭비다.
이제는 학제와 대입 제도를 함께 재설계해야 한다. 서양식 9월 학기제 전환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새 학년이 9월에 시작되면 수능은 5~6월쯤 실시되고, 여름방학 이후 학생들은 대학 진학이나 진로 탐색에 바로 나설 수 있다. 고3의 2학기 공백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교육 과정은 실제 수업으로 채워질 수 있다.
9월 학기제는 국제적 흐름에도 부합한다. 최근 국제바칼로레아(IB) 교육과정이 확산하고,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 주요 대학들이 9월 학기를 기준으로 운영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3월 학제를 유지한다면 교류와 공동 학위, 학생 이동성 측면에서 불리하다. 9월 학기제는 국제 표준에 맞는 학사 구조를 마련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입 제도 또한 수시·정시 이원화를 유지할 필요성이 점점 줄고 있다. 수시는 학생부 중심, 정시는 수능 중심이라지만 실제로는 두 제도가 중복돼 혼란만 가중된다. 수시 준비로 내신과 비교과가 강조되다가도 수능이 끝나면 정시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학교는 입시 일정에 끌려다니며 본래의 교육 목표를 잃는다. 차라리 5월쯤 수능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통합 선발을 시행한다면 학생과 학교 모두 명확한 일정 속에서 교육과 입시를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고3 교실은 교육이 멈춘 공간이다. 학생은 학교에 있지만 배우지 않고, 교사는 교단에 서 있지만 가르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낡은 제도 탓에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9월 학기제 전환과 대입 통합 논의를 적극적으로 논의해 봐야 한다. 고요한 자습 교실 속에서 멈춰 선 우리 교육의 시계를 다시 움직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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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철 부산외국어대 글로벌미래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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