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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김도훈의 엑스레이] [95] 내 전공은 행정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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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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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학과 출신이다. 가고 싶은 과는 없었다. 사실은 있었다. 영화과다. 그 대학에는 영화과가 없었다. 있어도 문제다. 부모님이 좋아할 리 없었다. 사람이 꼭 좋아하는 걸 하고 살 수는 없다. 나는 그걸 일찍 깨칠 정도로 영리하긴 했다. 영리함은 종종 인간의 미래에 독이 된다.

    행정학과를 간 이유는 성적이었다. 점수로 거들먹거리는 친구들은 다 출세, 아니 법대를 지망했다. 내 점수는 조금 모자랐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그랬나 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법대에 가지 않는다. 대부분 법대 출신인 정치인들 전과가 증거다.

    행정학 원론 첫 수업에서 깨달았다. 나는 이놈의 전공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첫 수업에 등장한 이름은 막스 베버였다. 관료제의 아버지다. 옆 정외과 애들도 막스를 배웠다. 카를 마르크스다. 이쪽이 훨씬 재미는 있었다. 두 막스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반대였다. 그래서 하나는 공무원을, 다른 하나는 정치인을 키웠다. 독일이 이과만 잘했다면 20세기는 좋은 차로 가득한 평화 시대로 남았을 것이다.

    첫 시험에는 ‘공익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종잇장을 노려보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부친을 살해한 빈민가 소년 유무죄를 배심원이 합의해 나가는 이야기다. 그걸 토대로 ‘다수의 판단이 항상 공익인가?’에 대한 소설을 썼다.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이나 봤으니 소설이라도 써야 했다.

    A+를 받았다. 막스 베버를 달달 외운 친구들보다 나은 성적이었다. 내 장기를 깨달았다. 글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교수를 현혹할 소피스트의 재능이었다. 지금 이딴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다는 실마리를 행정학과에서 찾았다. 내일은 수능일이다. 고3 여러분은 점수로 전공을 결정할 것이다. 대부분 원하는 과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여러분은 길을 찾을 것이다. 때로는 헛된 샛길에서 내 길을 찾는다. 영화광 자식이 행정고시로 출세하길 원하는 부모라면 이 글은 신문에서 오려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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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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