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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태평로] 처벌이 능사? 현장엔 서류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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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엄포에도 줄지 않는 산재

    노동부 안전 우수 건설사 졸지에

    공개 망신주기 처벌 1호 기업 돼

    해외처럼 처벌보다 예방에 집중을

    지난 6일 울산화력발전소에서 최소 3명이 숨지는 중대재해 사고가 또 발생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월 산업재해 사망 사고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며 징벌적 손해배상 등 강도 높은 규제를 지시했다. 이후 정부는 영업이익 5% 이내 과징금 부과, 건설사 등록 말소 등 초강력 대책을 내놨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산재 사망 사고를 줄이는 데 “직을 걸겠다”고 했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한 시민단체가 언론 보도를 토대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산재 사망 사고는 7월 66건, 8월 71건, 9월 82건으로 늘었다. 대통령의 서슬 퍼런 엄포도, 정부의 고강도 처벌에도 사고는 줄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울산 사고 현장을 찾은 노동부 장관의 일성은 “압수 수색 등 강제 수사를 하겠다”였다.

    해외는 다르다. 독일은 모든 사업장에서 위험성 평가를 의무적으로 시행한다. 근로자 대표가 안전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연방·주 정부, 산재보험 기관이 협력한다. 그 결과 독일의 산재 사망률은 인구 1만명당 2005년 0.12명에서 2022년 0.07명으로 떨어졌다. 일본도 2023~2027년 ‘제14차 노동재해방지계획’을 추진하며 외국인·특수고용직·고령자 맞춤형 안전 정책을 시행 중이다. 장기적인 계획과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일본 산재 사망자 수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공포보다 신뢰, 처벌보다 예방 시스템이 중요하다.

    산재는 대부분 복합 요인에서 발생한다. 기계 결함이나 관리 소홀뿐 아니라 근로자 부주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도 얽혀 있다. 삼성물산 사례를 봐도 그렇다. 지난 8월 고용노동부 장관이 20대 건설사 최고경영자(CEO)를 불러 모은 자리에서 삼성물산은 안전 관리 우수 기업으로 발표를 맡았다. 2021년부터 근로자의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한 삼성물산은 위험이 감지되면 누구든 즉시 작업을 멈출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른 협력 업체 손실은 삼성물산이 보전했다. 위험 요소를 발견한 근로자에게는 포상도 지급했다. 그 결과 올해 상반기까지 무려 58만건의 작업 중지권이 행사됐고, 재해율은 2021년 0.18%에서 올해 0.12%로 떨어졌다.

    이런 ‘안전 우수 기업’이 아이러니하게도 ‘중대재해 공시 1호 기업’, 공개 망신 주기 처벌의 첫 대상이 됐다. 지난달 29일 삼성물산의 판교 건설 현장에서 하청 업체 노동자가 사망했는데, 금융위가 상장사의 중대재해 공시를 의무화(지난달 20일)한 이후 나온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 명제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해결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선 하루 평균 7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고 자동차 공장을 폐쇄하고 CEO를 처벌해야 할까. 중대재해를 줄이겠다는 목표는 옳지만, 기업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붙이는 방식은 잘못됐다. 요즘 기업들은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끝장난다”며 안전 관리보다 ‘책임 회피’용 서류 쌓기에만 급급하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안전 관리 임원은 “이러다 보니 정작 사고는 줄지 않고 현장 안전 관리자와 근로 감독 규제를 위한 서류 작업만 늘고 있다”고 푸념했다.

    정부는 손쉬운 ‘군기 잡기’식 대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처벌 강화만으로는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산재 예방 시스템이 현장에 뿌리내리지 않는 한, 울산화력발전소와 같은 비극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비극의 악순환을 막으려면 AI 카메라로 사고 위험을 사전 감지해 알려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스마트 안전 장비를 지원하는 등 실질적 안전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한다. 정부는 해결사가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안전 문화를 정착시키도록 돕는 조력자이자 조정자가 돼야 한다. 처벌을 앞세운 공포 정책만으로는 결코 생명을 지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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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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