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9 (화)

    이슈 드론으로 바라보는 세상

    한때 '지상전의 왕자'였던 전차...우크라이나전서 드론에 박살난 이유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일보

    폴란드 육군 K2GF 전차. 폴란드 국방부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폴란드는 지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난 뒤 한국을 세계 방산 시장의 변두리에서 중심국가로 끌어 올려준 1등 공신이다. 폴란드는 전차·자주포와 같은 지상 장비에서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한국산 무기를 구매했는데, 국내외 언론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된 무기는 역시 K2 흑표전차였다. 한국산 전차 완제품의 최초 수출 사례였고, 진입 장벽이 높은 유럽 시장을 뚫은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군 납품 가격으로도 대당 100억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장비였던 K2는 생산량이 260여 대 정도에 불과했는데, 폴란드는 한 번에 180대를 계약했고, 800대를 더 사겠다고 약정했다. 당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유럽 대평원에는 러시아의 대규모 기갑부대를 막아 줄 자연 방벽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는 러시아 전차대군을 막을 전차가 절실했다.

    폴란드는 2022년 한 해에만 K2 전차 180대, 미국 M1A2 전차 250대 등 430대의 전차를 사는데 무려 81억 달러(약 11조 원)가 넘는 돈을 쓰며 독일을 제치고 단숨에 유럽 최강의 기갑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 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폴란드의 마음이 좀 복잡해진 것 같다. 1대에 300억~400억 원씩 하는 전차를 1,000대 넘게 사려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니 전차라는 물건이 그 비싼 돈을 주고 살 만한 무기가 맞는지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칠의 주도로 개발된 '육상전함'...보안 유지 위해 '물탱크'로 위장



    한국일보

    세계 최초의 전차인 영국 Mk.I 전차.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참호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이 만든 신무기다. 당시 참호전은 양측이 긴 참호를 파놓고 적이 돌격해 오면 기관총을 퍼붓는 형태로 벌어졌다. 양측 모두 적 보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철조망 등의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적이 장애물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으면 기관총탄을 퍼부어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싸웠다.

    영국·프랑스 연합군 약 198만 명과 독일군 100만 명이 맞붙은 솜 전투에서는 약 5개월 반 동안 양측 도합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연합군이나 독일군 모두 1㎞ 전진하는데 평균 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양측 모두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포격도 해보고 독가스도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기관총탄을 막아주며 적 참호 방어선을 뚫을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영국은 당시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훗날 총리)의 주도로 ‘육상전함 위원회’를 만들어 신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육상전함은 바다의 전함처럼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가진 무언가를 만들어 육상에서 굴려보자는 아이디어였는데, 그래서 전차의 원래 이름은 육상전함(Landship)이 될 예정이었다. 1916년 세계 최초의 전차인 Mk.I을 만든 영국은 이 신무기가 전장에 투입되기 전까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 신무기를 물탱크로 위장했는데, 이 위장명이 오늘날 전차를 뜻하는 ‘탱크(Tank)’의 어원이 됐다.

    초기 전차는 농업용 트랙터에 쓰였던 무한궤도를 쓰고, 여기에 적 기관총탄을 막을 수 있는 철판을 둘렀다. 돌격하면서 적 참호를 공격할 수 있는 대포와 기관총도 붙였다. 솜 전투에서 데뷔한 Mk.I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지만, 영국이 기대한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기계적 결함이 많아 전장에 멈춰 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처음에는 당황했던 독일군이 정신을 차린 뒤에는 대포를 끌고 와 간단하게 해치웠기 때문이다. 이후 독일도 노획한 영국 전차를 참고해 A7V라는 전차를 만들긴 했지만, 이미 전세가 기운 뒤여서 대량 생산하지는 못했고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나치 독일의 전격전...지상전의 최강자로 떠오른 전차


    전차가 지상전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나치 독일군은 전차를 중심으로 단숨에 적의 방어선을 허물고 들어가는 전격전이라는 전술을 고안했고, 이 전격전 앞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연합국과 독일 모두 전차가 지상전의 핵심 병기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전차는 양 진영에서 수만 대씩 생산돼 전장에 쏟아졌고, 처음에는 보병 화력 지원 정도로 인식되던 전차는 점차 적 전차를 잡는 대전차 전투 용도로 발전해갔다.

    2차대전 중반까지만 해도 보병은 전차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트럭으로 견인하는 방식의 대전차포가 있기는 했지만, 모든 보병이 이 크고 무거운 대전차포와 동행할 수는 없었고, 소총이나 기관총, 수류탄 따위의 보병 무기로는 전차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전차포는 적 전차의 강철 장갑을 뚫기 위해 고속으로 철갑탄을 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무거운 철갑탄을 빠른 속도로 날려 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추진 장약을 써야 했고, 그런 추진 장약을 쓰는 대포는 당연히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 초기 많이 사용된 37㎜ 대전차포는 410㎏이 넘었고, 대전 중반 이후 쓰인 독일군의 88㎜ 대전차포는 5톤이 넘었다.

    한국일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독일군 FLAK 36 88㎜ 대전차포. 패튼 박물관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42년 말, 미국이 ‘바주카(Bazooka)’라는 신무기를 내놓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 이 기사는 한국일보의 프리미엄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기사 내용은 한국일보닷컴에서 로그인 후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0215260002044

    회차순으로 읽어보세요

    1. ① 한국전쟁 대인지뢰 '크레모아'가 우크라이나 공중전에 등장한 이유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1516230005919)
    2. ② 방탄복 뚫지 못하는 총탄...'대포급 위력' 소총 나온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0209520001458)
    3. ③ 초음속 헬기 '에어울프'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이유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0915320000944)
    4. ④ ‘철갑의 야수’ ‘지상전의 왕자’에서 총알받이로 전락…전차의 진화 가능할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0215260002044)
    5. ⑤ "크고 무거워 '짬없는 후임'이 든다"는 유탄발사기...미군이 50년 만에 바꾸는 이유는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009090003760)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