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부 우리(Uri)주 주도인 알트도르프(Altdorf) 중앙광장에 서 있는 빌헬름 텔의 동상.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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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민족 영웅 빌헬름 텔(윌리엄 텔)이 아들 머리에 얹힌 사과를 석궁으로 쏘아 맞춘 운명의 날을 위키피디아는 1307년 11월 18일로 특정하고 있지만, 그걸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 날짜는 중세 구전들을 집대성해 15, 16세기 무렵 지어진 일부 설화집의 기록에 근거하지만, 저 사건이 실재했다거나 빌헬름 텔이 실존 인물이라는 역사 기록은 없다. 고대 북유럽 전설 속 유사한 이야기들이 그 시대 스위스 서민들의 염원을 만나 각색된 일종의 정치 신화라 보는 게 더 그럴싸하다.
14세기 스위스는 오랜 세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할령으로서 누려오던 지역별 자율-자치권을 잃고 당시 유럽 강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간접 통치를 받게 된 무렵이었다. 왕가가 파견한 총독의 횡포에 자치 지역들이 합심해 갓 저항에 나서던 때이기도 했다.
빌헬름 텔의 전설도, 스위스 총독이 저잣거리에 자기 모자를 걸어둔 채 행인들에게 모자를 향해 절을 하게 하면서 시작된다. 석궁 명사수 빌헬름 텔이 그 지시를 거부하자 총독은 빌헬름 텔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는 쏘아 맞추라는 벌을 내리고, 빌헬름 텔이 보란 듯이 사과를 명중시킨 뒤 두 번째 화살로 총독의 심장을 쏘았다는 이야기.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빌헬름 텔(1804년)’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을 맺지만, 시민들에게 빌헬름 텔의 두 번째 화살은 무장 독립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신호탄이었다.
스위스 동맹군은 합스부르크 군대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14세기 말 사실상의 독립과 현 연방 체제의 기틀을 다졌고, 그 전투 중 검증된 용맹함으로 15세기 이후 용병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스위스는 ‘30년 전쟁’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으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공식 독립했다.
과도한 자기확신 혹은 극한의 쾌감(도파민 보상시스템) 중독 탓일지 모르지만, 빌헬름 텔의 활쏘기를 흉내 내다 처참한 비극을 빚는 사례들이, 서커스 무대 바깥에서도, 더러 빚어진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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