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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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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청교육 4만명 명단 마이크로필름 찾아야…간첩조작 미제사건도 최소 300건” [안녕 진화위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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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 직전 포즈를 취하는 박태하 팀장.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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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 사건을 조사해온 독립기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분기점을 맞는다. 5년간 활동해온 제2기는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국회는 제3기 탄생을 위한 법안 통과를 준비 중이다. 3기 설립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한겨레는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안녕 진화위’를 시작한다.



    ‘진화위’는 그동안 부정적 뉴스로 자주 등장했다. 내란 옹호 논란이나 설립취지에 반하는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몇몇 위원장과 국회에 나와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기행을 벌인 국정원 출신 간부 탓이었다. 부정기 연재될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본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진실화해위 조사관의 출신 배경은 각양각색이다. 앞의 글에서 만났던 이들 중엔 역사학·사회학 연구자가 많았지만 기자나 국회 보좌관, 시민단체 활동가도 있다. 파견직 중엔 교육부·통일부·행정안전부 등 각 정부부처 공무원이 두루 분포해있다. 검찰·경찰은 물론 국정원·방첩사 수사관에 공군 또는 헌병 출신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운동권 출신’이다.



    2기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공식 종료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박태하(58) 조사2국 조사5과 삼청교육피해조사팀장을 만났다. 그는 인생의 상당 기간 노동운동을 하며 보냈다. 첫 일터는 1991년 경기 안산의 반월공단이었는데, 1년 만에 조직사건에 엮여 수원시 장안구청에 있던 경찰청 경기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6개월간 형을 살았다.



    그러다 10여년 만인 2004년 들어간 곳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였다. 이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5~2007)와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준비단 포함, 2014~2017),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2017~2018),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2022)와 인연이 닿았다. 마지막이 2기 진실화해위였는데, 각 위원회 조사관 생활이 쭉 이어진 게 아니어서 중간중간에는 지역운동을 하거나 민주노총 건설기업노조와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등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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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8월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시작된 삼청교육대 모습. 5개월간 6만755명이 끌려가 이 중 3만9742명이 순화교육을 받았으며, 1만16명은 근로봉사(강제노동), 7578명은 별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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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했던 그는 학생 때부터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다. ‘의식화’의 세례를 해준 이들은 엉뚱하게도 군대 고참이었다. 1988년 방위병 생활을 한 육군3사관학교에서 만난 기간병들이 마침 보안사(보안사령부, 현 국군방첩사령부)의 녹화사업으로 강제로 군에 끌려온 이들이었다. 그들과 어울리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을 읽었다. 2기 진실화해위의 주요 진실규명 대상이 된 강제징집 대학생들이 40여년 전 그에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워준 셈이다.



    박태하 팀장은 2기 진실화해위에서 팀원들과 함께 ‘삼청교육 피해사건’을 맡았다.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삼청교육 사건을 조사한 경험을 그래도 살리는 쪽으로 담당 업무가 배정됐다. 조사를 통해 7차례에 걸쳐 삼청교육 신청인 759명 중 662명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또한 삼청교육이 끝나고도 마지막까지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던 이들이 군부대에서 저항했던 ‘보호감호 중 사회보호법 위반사건’(27사단 감호생 난동사건)과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삼청교육과 똑같은 짓을 벌인 ‘교정시설 내 재소자 순화교육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했다. 자료수집에서도 능력을 발휘해 여러 희귀 문건을 발굴했는데, 삼청교육대의 최초 입안계획으로 추정되는 보안사의 ‘제초작업(안)’과 5·17 내란 계획서인 ‘국가기반 문란사범 조사계획 보고’ 등이 리스트에 있다.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에 성공한 전두환이 이듬해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군부대로 보내 훈련과 강제노동을 시킨 삼청교육은 자칫하면 오늘의 일이 될 수 있었다. 박태하 팀장은 “만약 지난해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국민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삼청교육과 비슷한 형태로 국민들을 잡아다가 육체적 고통을 가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삼청교육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당시 5개월간 6만755명이 끌려가 이 중 3만9742명이 순화교육을 받았으며, 1만16명은 근로봉사, 7578명은 별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전두환의 계엄령을 모방했던 윤석열이 계엄에 성공했다면 과거의 삼청교육을 어느 선까지 따라 했을까.



    박태하 팀장과 삼청교육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삼청교육에는 재일동포 간첩사건과 국가보안법 사건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국방부 과거사위 시절 이 사건들에 대한 기본 자료를 찾았다는 그는 지금도 “미제사건이 너무 많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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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1월 6일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사건 전모를 발표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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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3일 밤 긴급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헌정 질서를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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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삼청교육과 재일동포간첩 사건을 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불량배를 혐오했던 나로서는 삼청교육 피해자를 좋지 않게 생각해 처음에는 어떻게든 맡지 않으려 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적 있지만, 사실 피디 그룹(PD, 민중민주 그룹) 운동권 출신이라 주사파를 싫어하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을 북한과 연계된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건의 실체를 접하면서 달라졌다. 삼청은 1980년 광주에서 대중들의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불량배’라는 쉬운 먹잇감을 찾은 것이다.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재일동포들은 그저 남한도 북한도 아닌 하나된 조국을 그리워하는 이들이었다. 대중들은 전두환이 불량배를 소탕한다고 박수를 쳤고, 대공 수사기관에 체포된 재일동포들이 북한과 연계된 간첩 세력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나도 세뇌당한 이들 중 하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삼청교육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방부 과거사위 때 삼청교육 사건 조사하느라 1년 중 200일을 전국의 군 관련 회관에서 숙식하며 돌아다녔다. 삼청교육은 순화교육과 근로봉사, 보호감호까지 모두 군부대에서 실시됐다.(보호감호는 나중에 청송교도소에서 실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강원도 태백 출신의 여성 피해자다. 그분은 행실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공수부대에서 3주간의 삼청교육을 받고 태백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당시 이분에게는 1967년생의 딸이 있었는데, 사춘기인 중학교 2학년 무렵 동네 친구들로부터 엄마 때문에 ‘여자 불량배’라고 놀림을 당하는 등 2차 피해에 지속해서 노출되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도 ‘전두환이 잘했는데 그 밑의 부하들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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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가 1980년 6월10일 작성한 ’제초작업(안)’. ‘폭력배의 국토건설사업투입방안’이 담겨있다.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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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인·재야인사·학생을 계엄사령부 어떻게 역할을 나눠 검거할지에 대한 계획이 담긴 ‘국가기반 문란사범 조사계획 보고’ 문서. 최규하 대통령, 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주영복 국방부 장관의 사인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행정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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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3일 계엄이 성공했다면 삼청교육이 재현됐을까.



    “2기 진실화해위에서 ‘국가기반 문란사범 조사계획 보고’라는 이름의 9쪽짜리 문서를 찾아냈다. 전두환 신군부의 1980년 ‘5·17 내란 계획서’다. 김대중·김영삼 등 ‘주요정치인 추종세력’과 ‘데모 소요분자’, ‘권력형 부정부패자’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어떻게 역할을 나눠 검거할지에 대한 계획이 담겨 있다. 조사 목적으로는 “북괴의 대남 적화 야욕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나아가서 정의구현과 질서유지, 풍요롭고 자유로운 복지사회 건설”을 하기 위해 이를 막는 “‘국기를 문란하는 위해 분자’, ‘누적된 권력형 부정부패’,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강력사범’ 등을 과감히 적출 제거”하고자 한다고 적었는데,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문의 논리구조와 똑같다. 추정컨대, 윤석열은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그대로 따라 했을 것이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수첩에 적힌 ‘에이(A)급 수거 대상’을 모을 수집소 5곳 중 1곳이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옛 제11공수특전여단 주둔지)였는데, 비(B)급, 시(C)급 등으로 나눠 오음리나 그와 비슷한 곳에 사람들을 잡아다가 정신개조를 한다며 순화 교육을 했을 것이다.”





    ―2025년에 사람들을 군부대로 끌고 가 1980년처럼 웃통 벗기고 봉체조 같은 것도 시켰을까.



    “2023년 분당 서현동 칼부림 사건 등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삼청교육 부활시키라’는 댓글이 달리지 않나. 과연 정신교육만 했을까? 육체적 고통을 줘야 사람이 변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삼청교육 자료를 보면, 초기엔 박달나무 봉으로 무자비하고 때리고, 또 서로가 서로를 패도록 했다. 또한 매일 세 끼를 줘야 하는데 일부러 두 끼의 양을 세 끼로 나눠주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굶주리게 하면서 길들이는 거다. 또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 시절처럼 녹화사업과 똑같은 형태로 강제징집하고 다른 친구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빼 오도록 프락치로 심는 선도공작에 나섰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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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당시 간첩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김정사씨가 2011년 한겨레와 만난 모습. 그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지정된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회원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여권 발급을 거부당했고, 이 사건은 2기 진실화해위에 상정됐지만 ‘조사중지’됐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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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전남 여수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국가폭력 피해 상황을 말한 김양기씨. 전두환 신군부는 김씨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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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청교육 사건은 앞으로 뭐가 더 남았나.



    “일단 국방부 과거사위 때 법무부, 국가기록원 등에서 입수한 명부를 정리한 1만7000명과 2기 진실화해위에서 찾아낸 전남 화순경찰서 명단의 75명은 3기 진실화해위에 신청만 하면 진실규명 받을 수 있다. 화순경찰서에서는 우범자 관리 규칙에 의해 삼청교육 퇴소자 명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삼청교육 중 사망한 사람들을 3기에서 조사해야 한다. 2기에서 집계된 사망자만 54명이다. 이들은 단순사망으로 처리돼 있는데, 대부분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청교육을 받고 근로봉사를 거쳐 청송교도소가 지어지기 전 군부대에서 감호처분을 받던 중 저항을 하다 총기 사건이 일어났던 1사단·5사단·11사단·27사단에서의 이른바 ‘감호생 난동사건’을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





    ―삼청교육 때 끌려간 사람만 6만여명인데, 나머지 명단은 어디 있나.



    “경찰청 미래치안국 전산장비과에 삼청 피해자 4만여명 명부인 마이크로필름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몇 번 확인을 시도했는데 ‘없다’고만 했다. 계속 모른다고만 한다. 삼청교육 대상자 검거는 모두 경찰이 했기 때문에 각 경찰서에서 작성한 자료가 경찰청에 모여 있을 거다. 국방부나 국가기록원에서 자료 좀 안다는 사람들은 ‘마이크로필름 자료는 절대 폐기 안 시켰을 것’이라 말한다. 아마 경찰청도 그 마이크로필름이 어떤 제목으로 분류돼 있는지 모를 수 있다. 삼청교육 피해 사건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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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8월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시작된 삼청교육대 모습. 5개월간 6만755명이 끌려가 이 중 3만9742명이 순화교육을 받았으며, 1만16명은 근로봉사(강제노동), 7578명은 별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


    ―국방부 과거사위 때의 자료확보가 진실화해위와 밑천이 됐던 것으로 안다.



    “삼청교육 사건도 그렇지만 납북 귀환어부 사건, 재일동포 간첩사건 등과 관련한 1·2기 진실화해위 자료들은 대부분 국방부 과거사위 때 찾은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군 인사 및 행정에 대한 군정권과 합참의장을 통해 군을 동원할 수 있는 군령권 등 모든 권한을 틀어쥔 국방부 장관이 보안사를 비롯한 예하 부대에 ‘자료 협조요청’이 아닌 ‘지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장관 명의의 지시 공문에다 군무원 신분으로 비문실(비밀문서실) 등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어떤 자료들을 찾았나.



    “일단 국방부 영내에 있었던 국방부 사료편찬실과 합참 자료실은 공문 없이 무시로 출입하여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자료를 열람하던 중에 ‘대공 30년사’와 ‘대공 활동사’를 확보해 세상에 내놓았다. ‘대공 30년사’엔 보안사가 1950년께부터 다룬 간첩사건이, ‘대공 활동사’엔 1980년 초반에서 중후반까지의 대표적인 간첩 사건이 수록돼 있다. 계룡대 비문실에서는 ‘대공정보/판단’과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1970년 중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 수록한 800명의 간첩 명부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재일동포 간첩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2기 진실화해위에서는 삼청교육대만 팠다.



    “그래서 아쉬웠다. 재일동포 간첩사건과 국보법 사건 조사에 참여해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많이들 하는 이야기지만 2기는 피해자 중심으로 재심을 위한 진실규명 등 피해자 구제에 머문 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가해자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자 구제에 치중하다 보니 불법구금이나 구타 등 가혹 행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만 봤지 사건의 배경에 대한 서술이 많이 빠졌다. 안타깝다. 가령 재일동포간첩 조작사건이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안사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런 부분에 대한 총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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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 직전 포즈를 취하는 박태하 팀장.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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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런 건가.



    “대공 활동사를 보면, 중정이 1970년대 후반까지 간첩사건을 도맡아 했는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980년 12·12쿠데타에 성공해 실세로 등극하면서 이후 중정에 있던 트럭 10대 분량의 자료가 보안사로 옮겨갔다. 이후 보안사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다 보니 기소장에 중정 도장 등을 빌려서 썼다. 이렇게 간첩 만들기에 열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고 본다. 간첩 잡으면 법무부 보안유공자심사위원회(법무부)에서 돈을 받았다. 이 돈을 수사관들과 망원(프락치)이 나눠 가졌다. 그러고 승진을 독식했다. 중령급 과장들은 승진하기 위해 기를 쓰고 간첩을 만들어냈다. 간첩으로 조작한 재일동포에게 방위성금 헌납을 강요하며 거액을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은 하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재일동포간첩 조작사건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뭔가.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 배후로 지목된 재일동포 김정사씨 사건(1977년)과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었다는 허위 혐의로 간첩으로 몰린 김양기씨 사건(1987년)이다. 김양기씨 사건을 보면, 근현대사의 비극이 다 담겨있다. 이 분의 어머니를 목포에서 면담할 때, 당신의 남편(김양기 아버지)이 여수·순천 사건 때 여수 앞바다에서 장인의 배에서 수장당했다고 말했다. 4·3 관련자라는 이유였다. 그 아버지는 직업이 교사인 진보 지식인이었다.”





    ―미제 재일동포간첩 조작 사건이 많다고 알고 있다.



    “어림짐작으로 200~300건 정도 더 있다고 본다. 가령 보안사의 ‘대공 활동사’를 보면 2000년 기무사(당시 ‘보안사’의 이름) 창설 50주년 심포지엄에서 ‘국정원·경찰·기무사 검거 간첩 4470명 중 43%인 1950명을 기무사가 검거하였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간첩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령 프락치(정보원)를 어떻게 투입해 간첩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등등 숨겨야 할 일도 자랑스럽게 적어놓았다. 아마 보안사가 관여한 납북어부 등까지 합하면 그보다 수백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가해자들도 조사했는지.



    “국방부 과거사위 때 재일동포간첩 조작 사건 관련해서 보안사 보안과장과 실무를 뛴 준위 수사관 등 10여명을 조사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 ‘절대 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이 피해자들을 조사했던 보안사 광주 분실(당시 505보안부대)에서 피해자들은 매일 매타작을 당하고, 20여일씩 불법구금을 당했는데, 수사관들은 ‘절대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다. 인정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505부대 보안과장이었던 김아무개씨는 이름은 물론 성까지 바꾸고 숨어 살더라. 제적등본을 추적해 찾아낸 거였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골프 연습장을 하고 있었다. 부자도 아니었던 사람이 어떻게 골프연습장을 하고 있을까. 재산형성 과정을 추적해 보고 싶다. 삼청교육의 경우엔 2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에 급급하느라 가해자 조사를 거의 못했다. 경찰 몇 명 통해 실적경쟁 진술만 확보했다.”





    ―조사관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



    “독재정권이 그렇게 해야만 정권을 유지했던 거다. 슬픈 일이다. 1980년대엔 그렇게 고문해서 공산주의자 만들고, 불량배라고 몰아 삼청교육 보내 사회와 분리시켰다. 그리고 삼청교육의 다른 버전이 바로 형제복지원이나 선감학원 같은 집단수용시설이다. 이제 피해자들은 자기들 피해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 피해에도 공감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본인 삶의 단어가 뭔가.



    “사회변혁? 너무 거창하다. 그냥 좋은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거름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그동안 각종 위원회와 진실화해위에서 일했다. 물론 밥벌이도 하면서.”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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