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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영혼없는 공무원, 사라질까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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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지난 10월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내란 우두머리 방조 혐의 등 2차 공판에서 12·3 비상계엄 당일 대통령실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 일부가 공개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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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혁준 | 전국팀장



    1997년 8월6일(현지시각) 새벽 대한항공 801편이 악천후 속에서 미국령 괌 국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괌 공항의 항공유도장치가 고장 난 상황에서 기장은 착륙을 시도했다. 기장은 비구름을 뚫고 나가면 곧 공항 활주로가 나올 거라고 여겨 하강을 준비했다. 부기장은 좀 더 가야 활주로가 나올 거라고 여겼다. 부기장은 조종간을 잡아당겨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기장이 “야, 비가 많이 온다”고 하자, 부기장은 “예. 더 오는 것 같죠”라며 기장 말에 맞장구를 치는 데 그쳤다. 이런 대화가 오간 뒤 얼마 지나 비행기는 공항 근처 언덕에 충돌했다. 이 사고로 비행기에 탄 254명 가운데 2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작가인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이 비행기 사고의 주요 원인이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의 상명하복 문화에서 비롯했다고 봤다. 기장은 제대로 듣지 않았고, 부기장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글래드웰은 “부기장이 ‘기장님, 구름을 뚫고 나가면 활주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만약 안 보이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밖은 완전히 깜깜하고 비는 쏟아지는데 항공유도장치는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글래드웰은 기장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비행기를 조종하고, 부기장은 조용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대한항공 조종실 문화였다고 했다. 이런 상명하복 문화가 강할수록 윗사람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걸 어려워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점을 짚었다. 이와 같은 상명하복 문화가 강한 곳이 이른바 ‘영혼 없는 사람들’로 불리는 공무원 조직이다. 이런 공무원 조직에 균열을 가져올 만한 대책이 최근 나왔다.



    지난달 25일 정부는 76년 동안 법으로 유지한 공무원의 ‘복종 의무’를 없애는 걸 뼈대로 한 공무원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국가공무원법 57조의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를 빼는 대신, ‘상관의 지휘·감독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로 고치기로 했다.



    또 ‘공무원은 상관의 지휘·감독에 의견을 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내용이 위법하다고 판단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도 넣기로 했다. 지휘·감독이 위법하다고 판단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복종 의무는 1949년 국가공무원법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다. 당시엔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고 돼 있었으나, 군부 세력은 1963년 법을 개정해 이 대목을 빼버렸다.



    박현정 한겨레 기자는 11월26일치 신문에서 “무엇이 위법인지 판단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아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또 “법에서 공무원의 복종 의무가 사라지더라도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관료 문화가 지속되는 한 하위직 공무원이 상관 지휘에 의견을 제시하거나 거부하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공무원의 상명하복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잘 드러냈다.



    미국 행정학자 랠프 허멀(험멜)은 1977년에 낸 책 ‘관료적 경험’에서 “공무원은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비판했다.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열린 인수위원회 업무보고 때도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노무현 정부의 기자실 운영 방식을 따져 묻는 인수위원들에게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토로했다. 이렇게 공무원의 상명하복 문화는 오래된 얘기다. 영혼은 없고 복종만 있었던 그 끝판왕은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직전 열린 국무회의였다. 헌법을 부정하는 비상계엄 선포에 참석자 대부분은 반대하지 않았다. 영혼 없이 복종만 있는 공무원의 전형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법 개정을 계기로 이런 공무원들이 더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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