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바라비츠 골드’의 새순의 모습. 이름처럼 노란빛이 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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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12월3일, 천리포수목원에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찬 공기가 따뜻한 바다와 만나는 서해는 겨울철 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한다. 이날 수목원 가드너들은 소나무 기둥에 알록달록한 보온재를 두르고, 나뭇가지에는 산타 장식을 매다는 등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겨울철 수목원을 장식하는 자연물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삼나무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더욱 푸른 빛을 띠는 모습 그 자체로도 멋있지만, 묵은 가지를 이용해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만들기에도 더없이 좋은 소재인 덕분이다.
12월3일, 첫눈이 내린 천리포수목원 겨울정원의 풍경. 붉은 말채나무 뒤로 삼나무 ‘요시노’ 세 그루가 푸른 빛을 뽐내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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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초록 잎으로 매년 겨울 정원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삼나무는 측백나무목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성 침엽수다. 짧은 가지 끝에 바늘잎이 돋는 소나무와는 달리, 삼나무는 1㎝ 남짓한 길이의 바늘잎이 나선모양으로 배열된 독특한 잎 구조를 가졌다. 잎끝은 뾰족하지만 잘 구부러지는 편이라 결을 따라 만져보면 의외로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세로로 길게 벗겨지는 붉은 색의 수피도 정원에 독특한 질감을 더한다.
천리포수목원에 가장 먼저 도입된 삼나무 ‘요시노’의 모습. 바늘잎이 뾰족하지만 결을 따라 만져보면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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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삼나무가 뿜어내는 꽃가루로 인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삼나무 새순을 만날 수 있는 이 시기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손해다. 가지 끝에서 돋아나는 새순의 모습이 유난히 귀엽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연노랑빛의 새순이 매력적인 삼나무 ‘바라비츠 골드’, 흰 새순이 마치 눈이 내린 것만 같은 삼나무 ‘납토넨시스’, 둥근 수형처럼 새순마저 둥그렇게 솟아나는 삼나무 ‘글로보사 나나’ 등 오직 새순을 보기 위해 수목원 곳곳의 삼나무를 일부러 찾아가곤 한다.
삼나무 ‘납토넨시스’의 새순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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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의 식물이력관리 프로그램에서는 삼나무 도입 역사의 독특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나무가 바로 겨울정원에 있는 삼나무 ‘요시노’인데, 수목원 설립 초기인 1973년 미국의 한 양묘장에서 삽목묘 형태로 25개체를 도입해 키운 것이 시초다. 이후 1978년까지 약 6년 사이 삼나무 품종을 들여온 기록이 35회에 이른다. 삼나무 ‘로비’, 삼나무 ‘히메 스기’처럼 큰키나무로 자라는 품종부터, 삼나무 ‘반다이 스기’처럼 2m 남짓한 작은 키로 자라는 왜성 품종까지 수목원 조성 초기에 이례적으로 한 수종의 다양한 품종을 들여온 셈이다.
세 그루가 나란히 서있는 삼나무 ‘요시노’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
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삼나무를 들여왔을까? 이는 삼나무의 생육 특성과도 관련이 깊다. 이 시기는 한참 수목원의 기반을 다져가던 시기였다. 서해의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을 조성하고, 나무에 공급할 수 있는 물을 가두기 위해 인공 연못을 조성했다. 논밭으로 일구었던 바닷가의 거친 땅에서 빠르게 자랄 수 있는 수종도 필요했는데, 삼나무는 10년이 채 되기 전에 20m 이상 자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른 속성수에 속한다. 당시 천리포수목원 가드너들은 미국, 영국, 뉴질랜드 등에서 도입한 삼나무 묘목을 묘포장에서 키운 뒤 수목원 곳곳에 옮겨 심었다. 새순이 독특한 색을 띠거나 키가 작게 자라는 등 삼나무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품종이 있으면 다양하게 들여오기도 했다.
삼나무 ‘글로보사 나나’의 둥근 수형. 천리포수목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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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와 관련된 기록을 찾기 위해 수목원 조성 초기의 자료를 살펴보면서 자주 떠올렸던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는 긴 추격신이 끝나고 막다른 곳에 내몰린 용의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같이 전해달라며 형사에게 부탁한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라고. 그 용의자가 한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본질이라면 바로 그게 아닌가 싶어 무릎을 탁 쳤던 장면이었다. 매번 꿈같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생도 하고 죽을 만큼 괴로운데, 결국 지나고 보면 기꺼이 그 대상에게 내 인생이 잡아먹히길 바라는 나를 발견하는 일. 다양한 삼나무 묘목을 곳곳에 심기 시작했던 수목원 조성 초기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설립자가 주변 지인들에게 전했던 오래된 편지를 읽었던 순간은 지극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천리포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걱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돈을 쏟아붓더라도 이 사업을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1971년 10월) “천리포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게 달라지고 있어요. 이곳에는 뱀도 많이 서식하는데, 절대로 뱀을 잡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일러두었어요. 저는 천리포가 식물과 생태계가 어우러지는 자연 보존 지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무들이 크게 자라 그 안에서 많은 새들이 논다면 얼마나 매력적인 숲이 될까 싶어요.”(197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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