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도 화창했다. 2014년 4월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고자 인천항에서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들은 제주에 이르지 못하고 진도 앞바다에서 멈춰야 했다. 대신 몇몇 부모들이 416합창단 이름으로 제주에 가서, 마치 1990년대 대학로 소극장처럼 관객들과 숨결이 닿을 만한 작은 강당에서 노래를 불렀다. 활기찬 율동과 노래로 함께한 ‘세월호를 기억하는 제주 청소년 모임’ 청소년들이 1970년 남영호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말할 때는 그 작은 무대가 역사의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은 조금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하늘에 점점이 남아 있던 화창함은 오히려 반가움을 더했다. 종달리 남쪽 마을 삼달리, 그곳에 있는 삼달다방은 아침부터 손님맞이로 바빴다. 참사를 꿋꿋이 버텨낸 부모들을 맞이한 주인장들은 2000년대 초반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장애인 장기 거주시설에서 삶의 희망을 놓은 채 살아가던 이들에게 사람다운 삶의 기회를 주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던 한 여성과 그의 가족, 동지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제주에 정착한 또 다른 부모들이었다.
삶이 상처받은 이들이 치유와 휴식을 찾아 방문하는 그 무해한 공간에서는 한 작곡가이자 가수가 단독 콘서트를 한 주 앞두고 기타 한 대와 생목소리로 한 시간짜리 미니콘서트를 열었다. 통창으로 비껴드는 햇살을 조명 삼아 객석이자 무대에서 “그 쇳물 쓰지 마라”라고 노래한 그에게 합창단은 그가 작곡한 노래인 ‘사랑합니다’로 답례했다. 밖에서는 젊은 시절 암을 이겨내고 멀리서 마음의 결을 따라 찾아온 한 요리사가 온갖 채소들로 스페인풍 볶음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변을 겪은 섬에서 참사를 겪은 이들이 노래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곁을 지켰던 이들이 그 사람들을 환대했다. 이 작은 자들이 한데 모인 삼달다방은 그 순간 생생지락의 광장이 되었다.
이들이 1년 전 응원봉이었고, 남태령이었고, 키세스였다. 12월3일이 지나면서 1년 전을 돌아보며 민주주의를 회복했는지 반성하는 말들이 나온다. 돌아보면 강추위 속 집회들에서 3분 발언대에 선 시민들 목소리가 가득했던 작년 12월의 언어가 오히려 풍성했다. 그 자리에 모인 이유가 계엄 극복과 제도적 민주주의 회복을 넘어 소외된 사람들, 일상이 계엄인 사람들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으로 규정되는,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시공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 시간조차 이내 법률 논쟁과 대선의 태풍에 밀려갔지만, 다행히 그때의 목소리들은 기록되었고, 다시 소환되고 있다.
덜 말해진다고 해서 덜 중요한 삶은 아니다. 해수면이, 해수 평균 온도가 얼마나 상승했는지만큼이나, 그래서 해녀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치의 변화를 어떻게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해녀들은 거의 사라졌고, 부모들은 늙고 있다. 추상적인 민주주의의 안녕만큼이나 이 사람들의 안녕도 또박또박 이야기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사실 다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그 하찮음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 속성이다. 1년 전 그 추위에 광장에서 사람들이 꿈꾸었던 삶은 서로의 하찮음 덕분에 이루어지는 상호 의존과 인정, 치유와 평화가 있는 삶 아니었는가.
‘작은 세상’이라는 제목의 동요는 노래한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고통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기쁨·슬픔, 희망·고통을 나누던 작은 섬 제주의 작은 마을, 작은 이들의 이야기는 작년 겨울 광장의 모습이자, 그 광장이 지켜내려 했던 삶이다. 작은 자들이 광장을 만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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