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의 들보는 안 보였던 것일까.
최근 고환율 고통 속 재정·통화정책 수장들이 보낸 메시지는 시장 참여자들에게 분노와 허탈감을 선사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이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까지 가세해 고환율 문제를 '서학개미' 탓으로 돌렸다. 구 부총리는 "검토하지 않았지만 열려 있다"는 어정쩡한 화법으로 해외 투자 과세 페널티를 예고했다. 이 총재는 투자자들의 절박한 해외 투자를 "쿨하잖아요"라거나 "유니크한"으로 비유해 눈총을 받았다.
한은 총재 발언이 많이 아쉽다. 요즘 서학개미들이 말하는 "쿨하잖아요"라는 말은 그리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K증시의 매력 하락과 글로벌 기업 가치 격차를 냉정하게 계산한 결과다. 한은에 몸담은 젊은 서학개미들도 보스의 세상 문해력에 뜨악했을 것이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경제 수장들이 문제를 너무 쉽게 풀려 한다는 것이다.
불안한 원화값이 걱정된다면 부총리는 과감한 규제 개혁과 첨단산업 지원으로 투자 심리를 개선해 달러 수급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이런 근본 처방을 빼놓고 기출문제 풀듯 국민연금을 닦달하고 수출 기업들에 정부 지원 삭감을 경고했다.
한은도 마찬가지다. 작고 무뎌진 정책금리 칼로 환율의 방향성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는 시장 주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정책 조합으로 변동성의 진폭을 줄이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 완충의 시간에 기업과 가계는 변화에 적응할 체력을 기를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저속노화' 환경을 만들면 좋을 텐데, 고급 두뇌를 거느린 한은이 보여준 성과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물론 세상이 변했다. 작고 폐쇄적인 경제 시스템에선 이들이 두드리는 의사봉이 경제의 굵직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에 알고리즘까지 가세한 지금의 복잡계 경제에서 그 의사봉은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전쟁과 트럼프, 공급망, 인공지능(AI)까지 더해진 극단적 얽힘의 시대다.
그럼에도 구 부총리와 이 총재는 본연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잡다단해지는 외부 충격에 대비해 경제 펀더멘털을 지키고 한정된 재정·통화정책의 시너지를 키우는 일이다. 선출 권력이 투척하는 반시장·인기영합 정책 제안에도 의연해야 한다.
그래서 부총리에게 묻는다. 해외 원자력발전 수출은 독려하고 국내 신규 원전 건설은 저어하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고강도 토지허가제와 대출 규제로 실수요자의 내 집 살 '자유'가 제한되는 현실 부조리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재정은 빠듯한데 '전(全) 국민' 딱지가 붙은 현금성 사업이 떨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은 총재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정책 방향 전환"을 얘기했다가 채권·주식·외환시장이 발작한 점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총재의 입이 가뜩이나 불안한 시장 심리에 안정이 아닌 리스크 프리미엄으로 작용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두 수장에게 공통 질문이다. 원화 국제화·환율 안정의 장애물로 지적되는 폐쇄적 외국환거래법은 어떻게 손볼 것인가. 이 방 안의 코끼리를 놔두고 고환율 대책을 얘기한 건 정직하지 못했다. 작년까지 마구잡이로 쓴 내부 일시 차입금(일명 '한은 마통') 거래에서 두 기관은 헤어질 결심이 섰는가.
경제 수장들에게 국민이 바라는 건 대단한 '킬러문항' 풀기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공법을 제시하면 족하다. 이 기본에만 충실해도 부총리와 총재는 '슈퍼맨'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재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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