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 운영 국익 우선… 상황맞게 기민 대응
유연한 사고·실행력·치밀한 준비성 배워야
그런데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읽다 뜻밖의 구절을 발견했다. “고구려는 신의가 없으니(無信), 처음 친해도 나중엔 변할까(爲變) 두렵다”는 위나라 장수 양민(楊?)의 말이다. 연왕 풍홍이 사대를 거부하고 “고구려와 연합하겠다”고 하자, 양민은 고구려를 믿지 말라며 그처럼 말했다. ‘고구려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 표현이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대외정책 기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실제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장수왕은 망명해 온 연왕 풍홍을 죽이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송나라로 호송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에 대해 구대열 교수는 ‘삼국통일의 정치학’에서 “한국사 2000년을 통틀어 주변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이익을 극대화한 가장 위대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의리가 아니라 국익을 우선한 실용 외교가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비약시킨 것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
또 하나의 궁금증은 광개토대왕의 남방정책이다. 왜 그는 백제와의 전투에 그토록 집요했을까. 고구려는 문화·위협 구조상 대륙 지향적이었지만, 그는 즉위 6년 만에 396년 백제를 공격해 58성 700여촌을 탈취했고, 399년 신라와 동맹을 맺었으며, 400년엔 5만 대군으로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복수설’을 얘기한다. 곧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을 풀기 위한 남방 진출이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경기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와 서해 해상권을 확보하려는 고국원왕의 구상을 계승했다는 윤명철 교수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윤 교수는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에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정복과 외교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해륙(海陸)국가로 자리 잡았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의 제국 경영을 뒷받침한 정치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나는 그 실마리 역시 ‘치평요람’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는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不義)”고 평한 것은 고구려 왕의 가변성과 기민성을 드러낸다. 비록 적대국 군주의 발언이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고구려의 국가 운영 방략을 오히려 선명하게 보여준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숙신, 후연 등 주변 세력을 연이어 제압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멀리 있는 신라와 동진과는 화친을 맺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그는 알렉산더가 이수스 전투(기원전 333년)에서 보여준 기동전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여기에는 고구려의 강점인 기마병과 기마전술이 뒷받침되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국제 정세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광개토대왕의 유연한 사고, 신속한 실행 그리고 미래를 향한 치밀한 준비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