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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김동기의시대정신] 잔혹한 인간 사냥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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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비극 보스니아 내전 때

    일부 관광객 ‘민간인 사격’ 의혹

    단순히 쾌락·재미로 참여했다

    영화 속 ‘스릴러 현실판’ 충격적

    망토를 두른 작은 소년, 검은 코트를 걸친 금발의 여인, 증기를 뿜으며 달리던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 까만 우주로 비상하는 장면. 1980년대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는 오랫동안 내게 파편화된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별, 우주, 기차와 여행이 뒤섞여 막연히 두근거렸던 기억이다.

    얼마 전 OTT에서 극장판을 다시 보다 멈칫했다. 어린이 만화라기엔 상당히 어두웠다. 극단적 빈부 격차, 인간과 기계의 경계, 불멸에의 욕망 등 녹록지 않은 미래상이 2025년의 고민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잔혹했다. 기계 몸을 살 수 없는 빈민들만 남은 지구에서 기계 인간 귀족들은 취미 삼아 인간을 사냥한다. 주인공 철이(데쓰로)의 엄마도 그렇게 희생됐다. 훗날 철이는 어느 별의 성에 박제로 걸린 엄마의 시신과 마주하게 된다.

    세계일보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2016~2022년 방영된 HBO 시리즈 ‘웨스트월드’에서는 이 구조가 전복된다. 이번엔 인간이 인조인간 안드로이드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 웨스트월드는 서부 시대를 재현한 거대한 테마파크다. 하루 4만달러를 지불하면 스스로 인간이라 믿고 똑같이 피 흘리고 고통을 느끼는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폭행·살인·성폭력이 죄의식도 법적 제재도 없이 ‘놀이’로 소비된다.

    상처를 입거나 죽어도, 안드로이드는 수리되고 기억이 지워진 채 다시 웨스트월드로 돌아온다. 전날 자신을 죽였던 인물에게 다음 날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장면의 반복은 끔찍하다. 기계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은하철도 999, 인간이 기계 인간을 죽이는 웨스트월드. 존재의 서열만 달라졌을 뿐, 강자가 약자를 소모하는 구조는 같다.

    두 작품이 유독 섬뜩한 건 살상의 동기가 증오도 이익도 어떤 이념적 광기도 아닌 순수한 쾌락에 있다는 점이다. 허구이기에 가능한 지독한 설정일까. 마크 트웨인은 “진실은 허구보다 기이하다(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고 했다. 허구는 개연성을 갖춰 독자를 설득해야 하지만, 현실에는 그런 제약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현실은 때로 허구보다 더 잔인하고 더 황당하며 더 불편하다. 최근 유럽에서 드러난 사건은 그 극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11월, 이탈리아 검찰은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자행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인간 사냥 관광’(sniper tourism)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유럽의 부유층이 세르비아군에 거액을 지급하고 보스니아계 민간인을 조준 사격하는 ‘저격 체험’을 구매했다는 의혹이다. 사라예보는 언덕에 둘러싸인 분지여서 고지대에서 도심을 쉽게 겨눌 수 있었다. 목표물에는 가격표까지 붙었다. 어린이가 가장 비쌌고, 무장 남성과 여성이 그 뒤를 이었다. 노인은 무료였다.

    관련 증거를 모아 고발에 나선 저널리스트는 가담자들에게 정치적·종교적 동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사격장이나 사냥터에 가듯, 재미와 개인적 만족을 위해 참여했다는 것이다. “전쟁 관광객들이 사람들을 쏘러 그곳에 몰려들었다”는 증언에 참담해진다. 현대 유럽 최장기 포위전이자 최악의 인도주의 비극으로 남은 사라예보 포위전. 민간인 5434명을 포함해 1만395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당 사건은 2022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사라예보 사파리’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기계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사냥하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는 오히려 ‘순한 맛’으로 느껴진다. 1977년 은하철도 999나 1973년 웨스트월드의 오리지널 버전까지만 해도, 사냥의 주체와 객체는 어디까지나 인간과 기계 사이의 문제였다. 하지만 국가가 학생들을 섬에 가둬 서로를 죽이게 하는 ‘배틀로얄’(2000), 권력이 빈곤층의 사생 결투를 오락으로 소비하는 ‘헝거게임’(2012), 부자들이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을 죽음의 게임에 몰아넣는 ‘오징어게임’(2021)에 이르면 인간을 과녁으로 삼는 데 더 이상 ‘비인간화’라는 장치조차 필요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보스니아의 ‘인간 사냥 관광’은 이 참혹한 스릴러의 현실판이라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 대상으로 삼는 순간, 상대는 이름과 맥락, 얼굴이 지워진 익명의 표적이 된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윤리가 시작된다”고 했다. 얼굴은 “나를 죽이지 말라(Tu ne tueras pas)”고 호소한다. 그 호소를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 안의 폭력 가능성을 자각하고, 그 손을 멈추며, 타자의 생명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

    반대로 폭력은 언제나 타자의 얼굴을 지우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을 대상, 도구, 숫자, 표적으로 환원하는 순간, 인간의 잔혹성은 기이할 만큼 가벼워진다. 사라예보 언덕에서 민간인을 조준했던 행위도, 어떤 집단을 병균이나 기생충에 비유하는 언어도,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정치도 결국 같은 구조 위에 있다. 인간은 인간을 향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허구에서 현실로 이어진 인간 사냥의 긴 계보 끝에서,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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