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
붐비는 지하철에서 무심결에 내가 누군가의 발을 살짝 스친 것 같았다. 갑자기 권총을 쏘듯 누군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따진다.
“할머니, 발을 밟았으면 사과하세요.” 당황한 내가 답한다. “아유, 몰랐어요. 미안합니다.” 다시 그가 따진다. “내가 할머니가 내 발을 밟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밟혔다면 그냥 사과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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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할머니 호칭 듣는 봉변
‘오늘도 참는다’ 되뇌며 넘어가
외할머니 기억 활어처럼 생생
[그림=황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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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인지 서른 살인지 내게는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청년의 무례함에 가슴 속에서 훅하고 화가 치민다. 하지만 속으로만 소리를 지른다.
“이 나쁜 놈아, 너는 네 할머니한테 발 밟았다고 사과하라 소리 지르냐?”
나는 오늘도 참는다. 고로 존재한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남긴 이런 구절도 생각난다.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이 순간부터 나의 취미도 인내로 바꾸는 셈 치고 참는다. 잘못하다간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분에게 얻어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례한 청년이 따발총처럼 쏘아댄 말들이 내 안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은 기분 나쁜 느낌, 내가 혐오하는 정치인들의 말도 안 되는 막말들로 이어진다.
게다가 나는 그날 할머니라는 호칭을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할머니라는 호칭은 오래전 아줌마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을 때보다 훨씬 아팠다.
왜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묻지 마 폭력을 당한 기분이다. 대체 이런 호칭은 왜 없어지지 않는 건가? 덕분에 오랜만에 나의 할머니를 생각한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든든한 보호자였다. 40도 안 된 나이에 혼자 되어 딸 셋을 기르신 할머니는 늘 어딘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부족한 나를 길러준 고마운 분이다. 하지만 어릴 적 할머니는 내게 죽음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내었다. 늘 나이 드신 할머니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시달렸다. 바쁜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학교에 오시곤 했고, 70의 나이에 운동회에서 학부모 최고령의 나이로 뛰었다. 뛰는 할머니를 향해 “할머니 화이팅” 하는 꿈을 꾼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다정함에 관한 기억과 우울한 상실의 예감을 동시에 심어준 채, 오래오래 97세까지 사셨다.
초등학교 시절 채변 검사 봉투를 가져가야 할 때도 나는 귀찮아서 할머니 것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할머니는 철없는 손녀딸이 원하면 뭐든지 다 들어주었다. 학교 가기 싫으면 선생님께 손녀딸이 아프다고 말해주었고, 나를 괴롭히는 동네 머슴아이를 혼내주었다. 누군가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할머니의 기억을 소환한 시간, 할머니가 “이 나쁜 놈아 내 애지중지 손녀딸한테 할머니라니”, 막 그렇게 야단치실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무렵 내 나이 마흔이 넘었으니 기억을 간직한 이래 너무 오랫동안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껴안고 살았다. 그런 내가 할머니를 잊었는가? 그 어린 손녀딸이 할머니가 되었다는 걸 할머니는 아실까? 우리는 천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아픔을 잊는다. 그리고 갑자기 생전의 생생한 기억이 활어처럼 되살아나기도 한다. 결혼한 내 친구들은 실제 거의 다 할머니가 되었다. 손주가 애틋한 마지막 사랑임을 고백하고 싶은 얼굴들을 보며 나만은 외모뿐 아니라 마음도 할머니가 아니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에서 나는 문득 할머니처럼 행동하고 싶어졌다. 이 나이에 뭐가 무서울 게 있단 말인가? 서 있는 내 앞의 임산부 지정석에 손톱에 한 5㎝는 되어 보이는 긴 초록색 인조 손톱을 단, 뱀파이어 느낌의 젊은 여성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옆에 앉은 중년 남성은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옆을 보니 내 곁에 만삭의 여성이 서 있는 거다. 나는 할머니처럼 굵은 목소리로 “아무도 자리 양보를 안 하네” 하고 볼멘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한다. 정작 임산부석에 앉은 초록 손톱 여성은 핸드폰에서 눈조차 떼지 않고, 그 옆의 눈 감은 중년 남성이 깜짝 놀라 일어나 자리를 내준다. 그때 나는 무심코 위를 쳐다보다가 임산부를 구분하는 법에 관한 그림이 있는 스크린을 발견했다. 배가 부르지 않은 임산부도 있고 배가 부르다고 다 임산부는 아니다. 임산부는 가방이나 옷에 분홍색 임산부 배려 배지를 달고 다닌다. 내 눈은 그 안의 모든 여성의 배 위에 머문다. 젊은 날 어느 옷집에서 점원이 옷을 입어보라면서 “어머나 아기 가졌네요” 하던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때 나의 배는 똥배였다. 임산부 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종종 눈에 띈다. 나라를 구할 장한 여성이 누구인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오늘부터 나는 이상한 나라의 할머니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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