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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 (수)

    검열 파헤친 학자 "비상계엄 성공했다면 SNS 차단되는 디지털 파시즘 열렸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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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과 검열]⑤사죄와 기록<끝>
    검열 연구해 온 이민규 중앙대 교수 인터뷰
    1979~1981년 군부 삭제 기사 본보에 제공
    "신군부, '다 잘 돌아간다' 인상 주고 싶어 해"
    "전두환의 언론 통제, 내부 협조 없인 어려워"
    "기자 아파트, 면세, 해외 연구 혜택도 줘"
    "자료, 사회적 유산으로 남기고 연구 계속"


    한국일보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1979~1981년 신군부의 검열 삭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민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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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전후 비상계엄 때 신군부의 언론 통제는 언론 내부의 협조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언론 검열 연구자인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본보는 이 교수가 보관해 온 1979~1981년 비상계엄 당시 군부 검열로 삭제당한 본보 기사 원고 352건(요약 문건 포함)을 입수·분석해 '계엄과 검열' 시리즈를 연재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당시 신문과 방송, 통신 기사는 물론 외신과 잡지, 서적, 대학 학보까지 샅샅이 확인한 뒤 내키지 않는 기사를 지워 버렸다.

    이 교수의 지적대로 신군부가 언론을 제멋대로 주무른 건 내부자의 협조와 부역 때문에 가능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가 누구인지 권력 집단에 밀고하고, 군부가 불편해할 만한 기사를 삭제하는 데 협조한 건 같은 언론인이었다. 이 대가로 정계에 진출하고 금전적 이득을 얻기도 했다.

    이 교수는 "신군부 때는 요직에 있던 언론인 다수가 신군부의 집요한 공작에 포섭돼 워치도그(파수견)가 아닌 랩도그(반려견)가 돼 언론 통폐합 등에 관여했다"며 "비판하는 언론이 없는 국가는 건강할 수 없고 잘못된 것을 감추고 폐기하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4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일보

    언론 검열에 걸려 보도되지 못했던 12·12사건을 다룬 13일 자 지면 1면 기사. 이민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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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가 1979~1981년 검열 삭제한 한국일보 기사는 어떻게 입수, 공개하게 됐나.

    "직업 군인이셨던 부친(이병찬 예비역 대령)이 언론 대응을 하는 정훈 병과였는데 1979년 10·27 비상계엄 이후 육군본부에서 차출돼 언론검열단장을 지냈다. 그때 자료를 차곡차곡 모아두셨는데 아들이 언론학자가 됐으니 이를 건네며 '깊이 있게 연구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셨다. 2018년 돌아가시기 전 비슷한 취지의 유언도 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당신은 언론 검열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다. 부친을 대신해서 진심 어리게 사과하는 마음으로 언론사에 자료를 헌정하고, 언론사는 당시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보도 못 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고백했으면 좋겠다."

    -신군부는 어떤 사실이 국민에게 알려지길 두려워했나.

    "큰 틀에서는 언론을 통제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이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세상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고 싶어 했다. 예컨대 당시 어려웠던 경제 상황이나 불안했던 치안 등을 다룬 기사는 상당히 엄격하게 검열했다. 하다못해 오일쇼크 여파로 기름값 오른 것은 물론 원유도입 관련 기사도 못 쓰게 했다. 특히 군부가 정권을 잡았으니 군 관련 사고나 이슈는 민감하게 대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초 대학가에 교련 폐지 움직임이나 병영 집체 훈련 거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단 한 줄도 보도할 수 없게 했다. 반면 보도를 장려한 내용도 있다. 이를테면 학생 시위가 폭력적이고 과격화, 좌경화됐다는 식의 보도는 많이 하도록 구체적인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한국일보

    1980년 어느 날, 한국일보 편집국의 게시판 역할을 하던 칠판에 검열 지침이 써 있다. 경제불안을 너무 조지지(비판하지) 말라는 지침 등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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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도 신문에 싣지 못하게 하거나 왜곡해 쓰도록 했는데.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은 신군부에는 큰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 5월, 대학가를 중심으로 '서울의 봄'(유신정권이 끝난 뒤 민주화 요구가 분출한 시기) 시위가 확산했는데 신군부는 그달 17일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해 이를 철저히 막으려 했다. 이때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자 최정예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신군부는 광주에서 '제2의 부마항쟁'(부산·마산에서 1979년 10월 발생한 유신 독재 반대 시위)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인정사정없이 시위를 진압함으로써 광주를 밟고 정권을 잡는 확실한 계기를 만들려고 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언론 검열,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을 한 궁극적인 이유는.

    "(권력 장악을 위해) 소통을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초까지)에는 국민이 모든 정보를 신문에서 얻었다. 신문이 보도하면 모두 믿던 때였다. 정보 차단에 대한 잘못을 신군부에만 돌리는데 언론계 잘못도 있다. 신군부의 언론 장악이 가능했던 건 언론도 부응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1980년 1월 31일 신군부의 보도검열단이 한국일보의 마산 공단 관련 기사를 검열한 후 작성한 문서에 '근로자 선동 우려'라는 관제(검열) 이유가 적혀있다. 이민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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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부응했나.

    "예컨대 신문사 간 카르텔을 형성해 발행 면수를 8개 면으로 고정시켜 놓고 증면하지 않았다. 보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신문사 간 타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언론 통제는 언론인 출신이 담당했다. 신군부가 언론의 생리를 잘 몰랐기에 전·현직 언론인을 활용했다. 언론인을 무더기 강제 해직시킬 때도 언론사 내부자가 기자들의 성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방식으로 관여했다."

    -순응한 기자들에게는 특혜가 있었나.

    "신군부는 언론에 '당근'도 적지 않게 줬다. 기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 특혜 입주시켜 줬고 세금 면제, 해외 연수 등 혜택을 제공했다. 여기에 취한 기자들도 있었다. 한국일보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들은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동조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일으킨 전두환의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려고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언론인도 있었다. 여당 국회의원, 공공기관장을 한 언론인도 많았다. 반면 항거하는 기자는 투옥시키고 취업을 막는 등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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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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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 검열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 지난해 12·3 불법 비상계엄을 어떻게 봤나.

    "만약 (포고령 내용대로 언론 검열이 이뤄졌다면) 신문, 방송, 통신 등 전통 미디어뿐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같은 인터넷의 정보도 차단됐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만 얘기하고 일방적으로 입장을 발표하는 디지털 파시즘의 시대가 열렸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표현의 자유'를 기본으로 한 자유로운 공론장인데 계엄으로 이게 막혔다면 우리 사회는 40년 전보다도 훨씬 더 이전 시대로 후퇴했을 것이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가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를 가지고 대중의 편에서 진실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작용이 반드시 생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언론이 비판 기능을 충실하고 우직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언론이 없는 국가는 건강할 수 없다. 잘못된 것을 감추고 폐기하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없다."

    -학자로서 앞으로 남은 과제가 있다면.

    "제게 있는 검열 관련 자료는 엄혹한 시기의 기록이 거의 매일 남아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 할 일은 자료를 온전히 보존하고 복구해 당시 취재하고도 보도할 수 없었던 언론인의 진실을 규명하고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 자료를 사회적 유산으로 남겨 세계적으로도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례로 보여줄 수 있도록 연구하려고 한다."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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