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리바는 1930~50년대 할리우드의 '디바'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외동딸로 스스로를 '디트리히의 싸구려 버전'이라 소개하곤 하던 50년대 TV 스타다.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의 신화적 이미지를 치장하는 도구이자 '시녀'로 살아야 했다는 그는 92년 디트리히가 남긴 일기와 편지,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을 출간, 디트리히의 사생활과 함께 그는 자신을 위해 타인과 가족까지 철저히 짓밟고 이용한 잔인하고도 교활한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폭로했다.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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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1901~1992)는 매혹적인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1930~50년대 할리우드의 '디바(The Diva)'라 불린 독일 출신 미국 국적 배우 겸 가수다. 그는 무명 시절 오스트리아 출신 영화 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에게 발탁돼 영화 ‘푸른 천사(The Blue Angel, 1930)’로 화려하게 비상, ‘금발의 비너스’ ‘악마는 여자다’ 등에 잇달아 출연하며 원년 ‘팜므파탈’의 입지를 다졌고, 앨프리드 히치콕의 ‘무대 공포증(Stage Fright, 1950)’, 오손 웰스의 누아르 고전 ‘악의 손길(Tough of Evil, 1958)’ 등에도 출연했다.
히치콕이 디트리히를 두고 “그는 전문 배우이자, 전문 의상디자이너며, 전문 카메라맨이었다”고 평한 일화는, 정말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디트리히가 거장 감독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연기-이미지를 연출했던 배우였음을 시사한다. 스턴버그와 작업하면서도 디트리히는 사실상 직접 메이크업과 조명 등을 ‘감독’했는데, 그는 미스터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코와 입술 사이에 ‘나비 그림자(butterfly shadow)’가 생기도록 조명을 조절한 뒤에야 촬영에 응했다고 한다. 디트리히는 자신의 이미지-신화에 관한 한 감독들을 ‘감독’한 배우였고, 인기와 작품성으로 그 역량을 입증한 배우였다.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첫 영화 ‘모로코(Morocco, 1930)’에선 당시로선 파격적인 턱시도- 바지 정장 차림의 카바레 가수로 등장해 한 여성 청중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성적 자유와 독립성, 젠더 패션의 경계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움츠린 신비로움을 앞세운 스웨덴 출신 스타 그레타 가르보와 차별화했고, 50년대 마릴린 먼로가 넘보지 못한 지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상을 선취했다. 그는 남녀 불문 수많은 배우 및 정치인 등과 염문을 흩뿌렸고, 그들을 자신(의 신화)의 배경 속에 영민하게 배치했다. 자신의 장례식에 올 남자들 중 자기와 잔 이들에겐 붉은 카네이션을, 잤다고 떠벌이고 다니지만 실제론 못 잔 이들에겐 흰 카네이션을 주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디트리히의 이미지-신화를 치장한 배경 혹은 ‘소품’에는 그의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23년 결혼한 영화인 루돌프 지버(Rudolf Sieber, 1976 사망)와 외동딸 마리아 리바. 성인이 된 뒤로는 단 한 번도 디트리히를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는 딸 리바는 1994년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우리는 왕실의 일꾼들이었고(…), 디트리히는 여왕이었다. 아버지는 집사장이었고, 연인들은 구애의 조신들(courtiers)이었으며, 나는 시녀였다”고 말했다. 딸은 92년 디트리히 사후 남긴 일기와 편지, 자신의 경험-기억 등을 토대로 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전기(회고록)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의 삶과 전설’을 출간했다. 만인의 연인이던 당대의 디바가 실은 자신을 위해 타인들과 가족까지 철저히 짓밟고 이용한 “잔인하고 교활한 나르시시스트였다"는 폭로. 2009년 미국 방송아카데미 재단 인터뷰에서 리바는 “권력이 항상 승리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아름답고 유명하고 강력하다는 이유로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0년대 두 차례 에미상 후보로도 뽑힌 ‘키네스코프 시대’의 TV 스타였지만 스스로를 “디트리히의 싸구려 버전(Poor Men’s Dietrich)”이라고 자조하던 디트리히의 외동딸 마리아 엘리자베스 리바가 별세했다. 향년 100세.
유년 시절의 마리아 리바와 어머니 디트리히. 리바는 할리우드 세트장에서 '조수' 명찰을 단 유니폼을 입고 성장했고, 어머니의 고무줄 같던 나이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진짜 나이조차 몰랐다고 밝혔다. 게티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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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할리우드 파라마운트 영화사 세트장을 “진짜 집”이라 여기며 성장했다. 유럽식 귀족 교육을 받고 자라 미국 문화를 은근히 경멸하던 디트리히는 가정교사에게 딸을 가르치게 했고 10세를 훌쩍 넘겨서야 주변 권유에 못 이겨 스위스의 한 초등 기숙학교에 보냈다.
세트장에서 리바는 어머니의 의상 디자이너가 만든 랩코트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옷에는 ‘미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조수’란 명찰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고무줄 같던 디트리히의 나이 때문에 리바는,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76년 아버지 유품에서 출생증명서를 발견한 뒤에야 진짜 자기 나이를 알게 됐다. ‘조수’로서 그는 어머니 의상과 소품을 챙기고, 홍보물에 어머니 서명 도장을 찍고, 가슴 모양을 돋보이게 해주는 테이프 붙이는 일을 거들고, 화장실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소금을 먹고 토하는 어머니의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
어머니 침실을 드나들던 남자들과 보디가드들 외엔 친구가 없던 그는 12세 때 아역배우 주디 갈런드(Judy Garland)를 생일 파티장에서 만나, 현관에 앉아 대화한 게 또래와의 유일한 추억이었다고 했다. 스위스 학교를 다니던 중에도 툭하면 전화로 시험을 보거나 하키 시합 중인 딸을 불러내던 어머니는 39년 15세의 리바를 LA의 ‘막스 라인하트(Max Reinhardt)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리바가 레즈비언 가정교사에게 약 18개월간 상습 성폭력을 당한 게 사춘기였던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딸의 절박한 호소를 철저히 외면했고, 리바는 “(어머니는) 내가 겪은 성적 학대를 조종했다”고 책에 썼다. “남자에 대한 관심을 끊고,(…) 딸의 의무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강간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항상 복종하며 내 위에 군림하는 이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것.”
10대 말 우울증을 앓으며 알코올에 의존하던 리바는 43년 한 배우(Dean Goodman)와 결혼했다가 1년도 안 돼 이혼했다.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독일 심리학자 카렌 호니(Karen Horney)가 쓴 ‘우리 시대의 신경증적 성격’이란 책을 읽고 그 수렁에서 벗어났다. “나는 그 책에서 나를 발견했다.(…)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리바는 만 9세 때인 34년 스턴버그의 영화 ‘스칼렛 여제(The Scarlet Empress, 1934)’로 영화에 데뷔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역을 맡은 디트리히의 유년 시절을 연기한 단역이었다. 디트리히는 딸이 실제보다 어려 보이도록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만 촬영하게 했다. 리바는 어머니의 정부 중 한 명이던 데이비드 셀즈닉의 36년 영화 ‘알라의 정원(The Garden of Allah, 1936)’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어렵사리 곤경에서 벗어난 리바는 40년대 막스 라인하트 아카데미 등서 연기를 가르쳤고,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고, 오손 웰스가 이끈 예술집단 ‘머큐리 시어터(Mercury Theatre)’의 CBS 라디오 드라마 시리즈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며 어머니의 장악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47년 무대 감독 윌리엄 리바(William Riva, 1999년 사망)와 결혼해 4남을 낳고 해로했다.
미국의 50년대는 TV가 영화-연극의 아성에 도전하던 ‘키네마스코프’ 시대였다. 51년 CBS 앤솔러지 단편 드라마 시리즈 ‘Sure as Fate’에 출연한 리바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당 250달러에 CBS와 3년 전속계약을 맺고 이후 약 10년간 500여 편의 드라마와 여러 편의 CF에 출연했다. 52년과 53년 에미상 최우수 여자연기자상 후보에도 뽑혔다.
하지만 당시는 영화-연극계가 방송을 대놓고 깔보던 시절이기도 했다. “방송 연기자는 예술도 모르는 ‘저급한 아줌마들(Mrs. Glultz in the Bronx)’이 거실 소파에 앉아 즐길 오락거리를 만드는 자들이라고들 했어요.(…) 당연히 연기도 (영화인이 보기엔) 저급했죠.” 그건 디트리히가 딸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리바는 “뭐 그래도 난 상관없었어요. 내겐 재능이 없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이미 30, 40년대 영화 한 편당 수십만 달러의 개런티를 받았고, 50년대에도 주당 3만 달러를 받으며 라스베이거스 카바레 쇼를 진행하던 디트리히에겐, 자신의 ‘확장된 자아’ 혹은 소품이었던 딸의 방송 출연이 체면 구기는 짓이었을 것이다.
1952년 8월 시사주간지 'Time' 표지에 합성 사진으로 등장한 마를레네 디트리히(위)와 딸 마리아 리바(아래). 그해 리바는 에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로 뽑혔지만, 디트리히는 딸의 성취를 하찮게 여겼다. Time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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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가 첫 아들을 낳은 48년, ‘Life’지가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할머니(Glamorous grandmother))’란 타이틀을 달고 디트리히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디트리히는 손자 때문에 자신이 더 늙어 보이게 됐다며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딸을 꾸짖었다고 한다. 52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디트리히는 그 기사를 언급하며 “참 웃긴 일이죠. 서른다섯 살에 할머니가 된 게 무슨 대수라고”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50세였다.
파라마운트사 영화 유럽어 더빙 감독을 지낸 리바의 아버지 지버도 3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LA 교외 샌퍼낸도 밸리의 한 농장에서 닭을 키우며 아내를 외조했다. 숱한 연인들이 디트리히에게 보낸 편지와 먹지를 대고 쓴 아내의 답장을 정리하는 것도 ‘집사’의 역할 중 하나였다. 끝까지 이혼하지 않음으로써 ‘정상 가정’의 신화를 지켰던 부부는 서로의 사생활에 철저히 관대했고, 지버에게도 ‘여자’가 있었다. 지버는 가정부 겸 리바의 보모였던 러시아계 여성 “태미(Tami)” 마툴(Matul)을 성적으로 학대-착취했다고 한다. “(리바가) 청소년기를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자 친구였”던 태미는, 리바에 따르면 무려 15차례나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고,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던 끝에 65년 한 요양시설에서 숨졌다. 리바는 “무능한 남자들이 대개 그렇듯, 지버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대에게는 폭군이었다”고 책에 썼다. “근 30년에 걸쳐 그들은 태미의 영혼을 짓밟고 마음을 파괴했다. 내 부모는 그토록 철저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남편 루돌프 지버, 외동딸 리바의 가족 사진. 리바는 아버지를 여왕인 어머니의 '집사장'이라 표현했다. 부부는 각자 수없이 외도하면서도 '정상 가족'의 신화를 지키기 위해 76년 지버가 숨질 때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게티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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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간호사 겸 만화가인 대릴 커닝엄(Daryl Cunningham)의 2013년 책 ‘정신병동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마치 합리적인 것처럼 평가되는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기주의, 경쟁심, 도덕불감증, 피상적 인간관계, 그리고 남을 조종하여 이익을 얻는 능력은… 사업계, 정치계, 법조계,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는 가치다.” 그가 서술한 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특징들은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징과도 폭넓게 겹쳐, 두 장애를 ‘공감능력 결핍’이라는 단일 범주로 분류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두 장애를 포괄하는 이른바 ‘어둠의 3요소(Dark Triad)’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공감능력 부족 및 도덕불감증, 피상적 인간관계와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이다.
해마다 단풍철이면 관광객의 이목을 끄는 천연기념물 ‘반계리 은행나무’처럼, 수백 수천 년을 살아 우람해진 노거수(老巨樹) 주변이 대개 황량한 것도 타감작용(Allelopathy), 즉 식물이 뿌리와 잎, 줄기, 열매 등을 통해 타감(他感)물질(Allelochemicals)이라는 다양한 화학 물질을 분비해 주변 풀과 묘목이 못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물과 양분을 독차지한 나무의 너른 그늘도, 인간에겐 ‘아낌없이 주는’ 선물이지만, 다른 식물들에겐 잔인한 불모의 그늘이 된다. 은행나무는 타감작용이 왕성한 대표적 수종 중 하나다.
정신의학 상식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향을 성찰하고 객관화해 보다 건강한 정신-심리와 인간관계를 도모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게 정신의학계의 신중한 조언이다. 하지만 딸 리바에게 어머니 디트리히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였고, 그 진실을 알려야 했다고 책에 썼다. “세상 사람들이 유명한 이들에게 품는 강렬한 애착이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멍에다.(…) 우리 같은 이들은 그들이 성인처럼 숭배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안다. 우리는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을 공허 속에서 절규하고, 메아리 없는 절규를 반복하다 결국 침묵하게 된다.” 복수심과 악의의 소산이라는 일부의 세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사실’에 입각한 ‘전기 작가’로 자부했다.
50년대 전성기를 지난 뒤에도 디트리히는 브로드웨이에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투어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75년 호주 시드니 공연 중 다리 골절상을 입었고 79년 마지막 영화 ‘오직 지골로뿐’을 끝으로 연예계에서 은퇴,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칩거했다. 스위스로 이주한 뒤로도 수시로 어머니의 호출을 받고 로드 매니저 겸 조수로서 어머니를 보조했던 리바는 임종할 때까지 어머니의 침대 곁을 지켰다. 디트리히는 가족이 늙고 병든 자신을 방치한다며 툭하면 일기에 썼고, 리바는 매번 여백에 "Maria here"라고 메모해두곤 했다고 한다. 리바는 "나중에 보면 늘 내 메모는 매직펜으로 지워져 있었다"고 썼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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