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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 (수)

    [김택근의 묵언]종로3가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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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이 내리면 젊은이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화사한 차림에 큼직한 웃음을 머금고 삼삼오오 거침이 없다. 외국인들도 섞여 있다. 즐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에 불이 켜지고, 고기와 생선을 굽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지글지글 자글자글, 소리마저 맛있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아무 얘기를 해도 젊음은 아름답다. 불빛이 출렁이고 흥이 넘친다. 종로3가의 밤풍경이다.

    그 자리에 노인들은 낄 수가 없다. 젊은이들의 위세에 밀려난다. 아무리 잘 입고, 좋은 얘기를 해도 늙음은 남루하다. 어둠이 내리면 종로3가역은 내리는 청년들과 오르는 노인들로 붐빈다. 종로3가는 노인들의 거리였다. 탑골공원 주변, 국민 사회자 송해 선생이 사랑했던 송해길, 5번출구에서 갈매기골목에 이르는 길은 온통 노인들 차지였다. 종일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풍겨나왔고, 한여름에는 길바닥에서 막걸리 냄새가 올라왔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 익선동 한옥마을이 뜨면서 이곳 풍경이, 그리고 냄새가 달라졌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과 카페가 등장하고, 독특한 분위기의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익선동은 명소로 떠올랐다. 익선동을 찾은 젊은이들이 슬슬 노인들 영역으로 넘어왔다. 음식 맛이 좋다고 소문나면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 노인들은 경쟁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노인들은 비교적 말이 많고, 입맛이 까다롭고, 오래 머물렀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군말이 없고, 고분고분하며, 음식을 먹으면 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얼마가 나왔건 주저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렇게 웅숭깊었던 밥술집 주인과 그토록 친절했던 종업원들 표정이 바뀌었다. 단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어쩌면 노인들이 지레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인심만 바뀌는 게 아니었다. 노포들 고유의 맛들도 변했다. 노인들의 잔소리에 힘이 없어지자 설탕을 더 섞어 젊은이들의 입맛과 타협했다.

    서서히 업종이 바뀌었다. 홍어 맛이 괜찮았던 음식점은 호프집으로, 오래된 복집은 실내 포차로 바뀌었다. 코인노래방, 전자담배가게, 오뎅바, 인형뽑기점, 전자오락실 등이 들어섰다. 임대료가 폭등하고 프랜차이즈 업소들이 등장했다. 노포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업소들은 손님이 크게 줄었다. 1만원을 내고 서너곡을 부르는 유흥주점도 울상이다. 대낮부터 오부리(주점 반주)를 시작해보지만 예전만 못하다. 기원 또한 심각하다. 젊은이들은 인터넷 바둑을 두고, 노인들만 찾아와 수담을 즐겼지만 요즘은 빈자리가 더욱 늘었다. 이대로 간다면 언제 간판을 바꿔달지 알 수 없다.

    이런 판에 종로구청은 아주 야속한 조치를 발표했다. 내년 4월부터 탑골공원 안팎에서 술을 마시면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장기와 바둑도 둘 수 없다. 이미 담벼락을 따라 노란 선을 그어놓았다. 사실상 노인들을 탑골공원 안과 밖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궂은 날씨에도 수백 명이 모여들던 노인들의 공간이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 앞으로는 두 사람이 두는 장기판을 수십 명이 구경하던 한낮의 승부도 볼 수 없다. 그곳에는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있다. 또 3000원짜리 국밥집(단 한 곳 남았지만)이 있고, 잔술을 마실 수 있는 선술집이 있고, 6000원짜리 이발소가 있다. 이런 작고 소박한 집들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음주, 방뇨, 소란 행위 등 노인들의 추태에 많은 민원이 제기되어왔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노인들을 쫓아낸다면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젊은이들이 대거 몰려와 한창 뜨고 있는 거리에서 노인들 일탈이 잦다보니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을 바꿔서 관청에서 장기나 바둑을 둘 수 있는 탁자들을 비치하고, 화장실을 마련하고, 관리인을 상주시켜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도록 유도했으면 어땠을까. 수십 년 동안 봐왔던 탑골공원 풍경 하나를 이렇게 지워버려도 괜찮은 것인가. 공청회라도 열어 이런저런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 않는가. 행색이 허름해도 저들은 형편이 궁핍할 뿐이지 삶이 저렴한 것은 아니다. 비정하고 예의가 없다.

    종로3가라 하면 누구나 노인을 연상했다. 실제로 도심 속 노인들의 성이었다. 멀리서 보면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들어가면 있을 것이 모두 있다. 그 속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싸움도 한다. 작지만 큰일이고, 그 즐거움의 크기는 누리는 자만이 알 수 있다. 노인들이 세운 작은 세상이 스러지고 있다. 종로3가, 수십 년 동안 굳건했던 아성이 무너지고 있다.

    경향신문

    김택근 시인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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