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0 (수)

    기계에게 위로받는 시대… AI와의 감정 교류가 촉발한 ‘인지혁명 2.0’[맹성현의 AI시대 생존 가이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AI가 바꾸고 있는 인간관계

    인간-AI 準사회적 관계가 일상으로… 언어에 이어 AI가 인지구조 새로 짜

    감정영역까지 들어와 애착 형성돼… 기존 인간 네트워크 약화시킬 우려

    인간 확장 도구 아닌 대체할 위험도… AI 기술 확보 더해 정체성 논의해야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맹성현 태재대 부총장·KAIST 명예교수


    《“지금 기분이 어때?” 스마트폰에서 질문이 흘러나온다. 이제 연인이나 친구가 묻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인공지능(AI)이 우리의 안부를 묻고, 농담을 건네고, 때로는 위로까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AI와 ‘사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를 뜻하는 ‘파라소셜(parasocial·준사회적)’을 선정한 배경에는 이런 인간과 AI의 관계도 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한 ‘인지혁명’은 약 7만 년 전의 일이다. 인류가 언어를 통해 추상적 개념을 공유하고, 협력을 통해 문명을 건설하게 된 계기가 된 인지혁명은 뇌의 확장, 언어의 발생, 사회의 형성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필자는 생성형 AI로 시작된 현재의 변화를 ‘제2의 인지혁명’ 수준으로 본다. 인류의 인지 체계가 AI에 의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뇌는 포화 상태다. 인터넷 포털, 전자상거래, 소셜미디어 등이 만들어내는 정보와 사물인터넷(IoT)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인간의 뇌 용량은 7만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초기화된 뇌’를 가지고 태어나 그 많은 지식을 살면서 습득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가 집합적으로 축적한 계통발생적 지식과 개인이 평생에 걸쳐 습득할 수 있는 개체발생적 지식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 괴리는 어떻게 메워지고 있는가? 인간은 그 괴리를 디지털 전환(DX)이라는 방법으로 대응해 왔다. 내비게이션, 검색엔진, 자동번역 및 요약, 그리고 AI 등이 정신노동의 자동화를 이끌어 온 것이다. 인간은 뇌의 작은 기억 용량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개인의 뇌 바깥에서 기억하고 학습하며 추론하는 능동적인 ‘외뇌(外腦)’를 등장시켰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인간의 손발을 자유롭게 했다면, 지금의 디지털 전환은 포화되고 있는 뇌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AI는 업무 영역을 넘어 감정 교류의 영역까지 진출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AI 기업 xAI가 올해 2월 출시한 챗봇 그록(Grok)은 ‘음성 모드’와 함께 파격적인 기능을 선보였다. ‘거침없는’, ‘로맨틱’, ‘이야기꾼’ 등의 모드를 선택하면 다양한 페르소나의 AI와 대화가 가능하다. 사용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목소리’를 가진 AI와 ‘인연’을 틀 수 있다. 이처럼 AI는 빠른 속도로 의인화되고 있다.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AI와의 관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미국 비영리단체 ‘커먼 센스 미디어’의 올해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는 이제 정서적 지지, 외로움 해소, 심지어 연애 상대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정보를 얻으려고 챗봇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AI의 감정지능 모사가 인간의 감정을 움직일 만큼 정교해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등장하는 필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AI의 발전은 극히 혁명적이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화하면서 많은 블루칼라 일자리가 사라졌던 것처럼 현재의 AI는 정신노동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혁명적인 것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인간과 AI의 상호작용으로 대체되면서 인류사에 큰 전환점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무소불위의 지능을 갖춘 AI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면 기존 인간관계에는 큰 균열이 생길 수 있다. 지식의 보유·전달·활용으로 맺어진 사제지간의 관계, 업무 협력을 위해 엮인 동료 및 선후배 관계, 가족 관계 등이 와해될 수 있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똘똘한 AI 에이전트 하나만 데리고 있다면 많은 일과 업무가 해결될 수 있으니, 굳이 지금과 같은 휴먼 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간관계의 변화는 크고 작은 사회 구조의 변형을 의미한다.

    7만 년 전 인지혁명에서는 언어가 핵심 매개체였다. 지금의 인지혁명에서는 AI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언어가 인간들 사이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 부족과 국가를 형성했다면, AI는 기존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 ‘카페’, ‘단톡방’, ‘채널’ 같은 가상공간이 기존의 물리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더니, 이제는 AI라는 새로운 구성원이 우리 곁에 들어와 새로운 형태의 공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문명의 대전환으로 귀착될 ‘제2 인지혁명’이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 각국 정부는 AI 반도체 확보와 대규모언어모델(LLM) 개발 등에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이 혁명이 인간의 정체성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턱없이 부족하다. ‘소버린 AI’(국가 주권 AI)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AI 시대의 인간 주권’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에게는 AI라는 새 동반자가 주어졌다. 이것을 인간 확장의 수단으로 삼을지, 인간 대체의 위협으로 만들지는 우리 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맹성현 태재대 부총장·KAIST 명예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