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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한국 축구 선수들 해외 진출 전초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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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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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일 자 스포티비뉴스 한준 기자가 쓴 '한국 선수만 4명' 호이킹 김동진 '임대 영입' 기사에는 리만 FC 백지훈과 호이킹 SA 김동진 김진서 서상민 등 홍콩 프로 축구 1부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 4명의 선수 이름이 모두 나온다.

10개 클럽으로 이뤄진 홍콩 프리미어 리그에 한국인 선수 4명은 적지 않은 숫자다. 요즈음 한국과 부쩍 가까워진 베트남의 프로 축구 1부 리그인 V 리그 1 14개 클럽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프랑스 나이지리아 등 여러 나라 선수들이 있는데 2018년 시즌 현재 한국인 선수는 없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리그에는 한국인 선수가 여럿 활동하고 있다.

1956년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우승 한국 준우승 이스라엘 3위 홍콩 4위 월남(통일 전 남베트남)] 개최지인 홍콩은 한때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1차 예선 A 그룹 1조에서는 홍콩과 일본이 조 1위와 2위로, 2조에서는 이스라엘과 한국이 조 1위와 2위로 그룹 준결승에 올랐다. 1조 경기에서 일본을 1-0으로 잡은 홍콩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한국과 준결승에서 1-3으로 져 탈락했다.

그러나 홍콩은 이때 프로 리그 레인저스에서 활약하고 있던 주 공격수 곽가명[郭家明, 궉가밍)을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 국내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인저스는 2018년 현재 14개 클럽으로 운용되고 있는 홍콩 프로 축구 2부 리그의 멤버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 또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홍콩은 죽(竹)의 장막으로 가려진 중국을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이 기간 한국과 홍콩은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는 물론 여러 분야에서 많은 교류를 했다. 그 무렵 홍콩은 일부 부유층의 해외 쇼핑 명소였고 밀수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수교 이전 홍콩은 남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컵 1984년 대회 아시아 지역 예선, 1984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상하이) 등 중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들과 취재진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1984년 3월 테니스 데이비스컵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 2회전에서 중국과 겨루게 된 김춘호 이우룡 송동욱 유진선 노갑택 등 한국 선수들은 홍콩에서 입국사증을 받은 뒤 중국 민항기를 타고 대회 장소인 쿤밍으로 갔다. 테니스 대표 팀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최순영 회장 등 임원 4명은 4월 광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에 갔는데 이때도 물론 홍콩을 경유했다.

이러다 보니 한국과 홍콩은 자연스레 많은 교류를 하게 됐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일도 있다.

1948년 7월 6일 한국은 홍콩에서 축구 친선경기를 했다. 대한축구협회 자료에는 A 매치로 분류돼 있지 않지만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한국 축구 대표 팀이 특정 협회(또는 나라) 대표 팀과 경기를 펼친 것은 이 경기가 처음이다. 이때 한국 축구 대표 팀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길이었고 5-1로 이겼다.

한국 축구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에서 2-3으로 지는 등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유중국(오늘날 대만)에 밀렸는데 원로 축구인 박경호 선생에 따르면 그 무렵 자유중국 대표 선수들은 홍콩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1978년 차범근이 서독(당시)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에 입단하기 전 홍콩은 한국 축구 선수들의 해외 진출 창구이기도 했다.

중·장년 축구 팬들이 기억하는 골키퍼 변호영 김황호를 비롯해 김정남 전 국가 대표 팀 감독의 쌍둥이 동생인 강남-성남과 박병철 이강민 강기욱 박수덕 등이 1970년대 홍콩 리그에서 뛰었다. 1960년대 말 허윤정이 잠시 홍콩 리그 사우스 차이나 클럽에서 활동한 적이 있지만 한국 축구 선수들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홍콩 리그는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당시 세미프로 형태인 국내 실업 팀 소속 선수들 연봉의 두 배쯤 되는 대우를 받았으니 가 볼 만한 곳이기는 했다.

그 무렵 홍콩 프로 축구는 1~3부 리그 체제였고 1부 리그 13개 클럽 가운데 하나인 세이코 구단 관계자가 1970년대 중반 한국에 와 먼저 이세연 이회택과 만났으나 두 선수는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다.

이어 정규풍 김재한 변호영 강기욱 박수덕 등을 접촉했고 이들 가운데 앞에 나온 선수들이 홍콩 리그에 진출했다. 이들이 스카우트 대상으로 점찍은 선수들은 거의 모두 국가 대표 1, 2진인 청룡과 백호 소속이었다.

40여 년 사이에 홍콩 리그에 가는 선수들 수준이 이렇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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