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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이종석 칼럼] 비핵화, 북한 인사의 질문과 나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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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해제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야 한다. 최근 미국은 내년 봄 예정된 독수리훈련의 유예를 결정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비핵화에 성과가 있으면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는 분명히 완전한 비핵화 이후에나 제재 해제가 가능하다는 기존의 입장과 결이 다른 것이다. 북한의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먼저 유연성을 보여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한반도 비핵화 국면이 열리면서 올가을 남북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1년 만에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오랜만에 북한 인사들을 만났는데 익숙한 얼굴도 꽤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 기선제압을 위해 고압적 태도를 보이고 체제선전에 열을 올리던 과거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고 실용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통일부 장관 출신의 한반도 전문가라는 이력 때문인지, 행사에 동행한 북한 인사들은 짬짬이 현 정세에 대한 나의 판단을 듣고 싶어 했다. 덕분에 그들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에서 유엔의 대북경제제재 해제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묻어났다. 지난 4월 북한의 국가발전노선이 ‘핵·경제 병진’에서 ‘경제발전 총력 집중’으로 전환하면서 외부와의 경제협력이 더 절실해진 듯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재 해제의 열쇠를 쥔 북-미 간 비핵화 대화에 관심과 질문이 집중됐다.

그들의 질문 요점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할 경우 ‘정말 미국이 자기들을 살려두겠느냐’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평양 방문 때도 북한 인사가 내게 던진 첫 질문이 “우리가 리비아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였다.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전보장을 약속받고 핵무기를 포기한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시민군과의 내전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NATO)의 공습을 받고 몰락한 사실을 두고 한 질문이었다. 미국이 카다피의 몰락에 관여한 것이 적어도 북한에는 ‘합의에 의한 핵 포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적신호가 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카다피 사망(2011년 10월) 직후인 2012년 4월 헌법에 핵보유를 명기하였다. 나는 북한이 비핵화를 할 경우 어떤 경우에도 남한이 미국의 대북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할 것이며, 중국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과 리비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역설했지만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신뢰할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 비핵화와 북-미 간 신뢰의 형성을 연동해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즉, 완전한 비핵화를 제재 해제의 전제로 내세우는 미국의 주장보다 주고받기식의 단계적 동시 행동을 통해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는 북한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이미 핵·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하고 지하 핵 시험장까지 폭파한 북한에 대해서 미국이 당장 상응 조치를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비핵화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해법을 묻는 북한 인사들에게 나는 억울하더라도 북한이 한번 더 먼저 진전된 조치를 내놓음으로써 미국의 유연성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대답했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자 패권국가인 미국이 동시 행동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교정시키기는 어려우며 북한의 국익을 증진시키는 길은 선제적 절충뿐이라고 했다.

북-미 간 교착국면의 타개가 절실한 지금, 다시 나의 대답을 다듬어본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경제부국’이라는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 핵무기를 포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김 위원장의 선택을 고무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제재를 해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북 불신이 만연한 미국 조야는 전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트럼프도 새로운 명분 없이 이 상황을 돌파하기 어렵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해제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야 한다. 마침 최근 미국은 내년 봄 예정되어 있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독수리훈련의 유예를 결정했다. 북-미 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바람직한 결정이다. 이어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비핵화에 성과가 있으면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는 분명히 완전한 비핵화 이후에나 제재 해제가 가능하다는 기존의 입장과 결이 다른 것으로서 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가 20%에 이르면 불가역적이 된다’며 제재 해제의 기준을 시사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북한의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이 먼저 유연성을 보여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제는 북한이 움직여야 한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하며, 북한 비핵화는 불가역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 조야의 비관론을 극복하고 대북제재 완화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창의적인 추가 비핵화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해온 한국 정부와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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