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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엉뚱한 곳에 꽂힌 케이블… '멈춤' 대신 '정상 진행' 신호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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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탈선 사고]

KTX 탈선, 황당한 사고 원인

지난 8일 탈선(脫線)한 KTX 강릉선의 사고 원인은 '선로 전환기'가 고장 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철도는 자동차와 달리 운전 핸들을 조정하지 않고 바퀴에 플랜지(테두리)가 있어 선로만을 주행하게 되는데 열차가 다른 선로로 바꾸어 탈 때 이 선로 전환기가 선로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와 코레일은 9일 "사고 지점에 설치된 두 선로 전환기가 서로 뒤바뀐 정보를 인식해 잘못된 신호를 전달했고, 그 신호를 받은 열차가 문제가 있는 선로로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 같은 위험한 상황이 상당 기간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코레일이 조금만 안전 점검을 철저히 했더라면 방지할 수 있었던 사고였다.

◇선로 전환기 뒤바뀐 사실 몰랐나

국토부와 코레일 등에 따르면, 선로 전환기는 선로를 바꾸는 작업을 문제없이 마치면 '정상 진행' 신호를, 문제가 있을 때는 '멈춤' 신호를 보낸다. 일종의 '신호등'이다. 이 신호는 인근에 있는 '신호소(信號所)'로 전달되고, 신호소는 달리는 열차로 신호를 전달한다. 열차는 이를 받아 계속 달릴지, 멈출지를 결정한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선로 전환기는 선로에 문제가 발생해 '멈춤' 신호를 보냈어야 했는데, '정상 진행' 신호를 신호기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열차가 엉터리 신호를 받아 선로를 그대로 달리다 탈선했다는 것이 관계 당국의 설명이다.

이 같은 선로 전환기 오류가 발생한 것은 30m 인근에 설치된 또 다른 선로 전환기와 서로 신호 체계가 뒤바뀌면서 발생한 것으로 국토부 등은 보고 있다. 사고 직후 국토부가 두 선로 전환기의 신호 정보를 받는 청량신호소의 신호기계실을 확인해 보니, 두 선로 전환기의 신호 케이블이 반대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작년 9월 해당 선로 전환기가 설치됐는데 그 이후부터 이런 상태가 계속된 것인지 과거 결함 이력, 건설 당시 설계도와 책임자 등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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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직전에 누군가가 회로 케이블을 뒤바꿔 연결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국토부 관계자는 "회로 케이블을 일일이 반대로 끼우는 작업 자체가 난해한데, 누군가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다른 선로 전환기 1만대는 안전한가

전문가들은 사고가 난 선로에서 이 같은 오류가 이전에도 수차례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두 선로 전환기가 반대되는 정보를 전달했는데도 운 좋게 계속 같은 상태였다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코레일이 선로 전환기를 조금만 꼼꼼히 점검했다면 이번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 철도 관계자는 "매뉴얼대로 테스트를 했더라면 금방 알 수 있는데, 별일 없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 의례적인 정비만 하니 이런 문제를 잡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다른 선로 전환기는 괜찮으냐는 것이다. 지난 8월 말 기준 전국에는 선로 전환기가 1만87대 있다. 이 중 40%가량(3949대)은 내구연한을 넘긴 노후 설비였다.

◇속도 조금만 높았다면 대형 참사

사고 당시 열차는 시속 100㎞ 정도로 달렸지만, 이 열차는 서울과 강릉 구간을 최고 시속 250㎞로 달린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열차가 고속 구간에서 탈선했다면 '잭나이프(등산용 접이 칼) 현상'으로 대형 참사가 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잭나이프 현상은 기차나 대형 트레일러 같은 '관절 차량'의 맨 앞부분 견인차가 급정거하거나 장애물과 충돌할 경우 뒤에 연결돼 있는 끌려가는 차들이 잭나이프처럼 접히면서 앞차와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지난 1998년 독일에서 발생한 ICE 고속열차 탈선 사고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견인차 뒤에 연결된 5량의 열차가 꺾이며 서로 충돌해 승객 101명이 숨졌다.

충남대 토목공학과 임남형 교수는 "시속 200㎞ 이상 질주하던 열차가 잭나이프 현상으로 구겨지며 교각 등 장애물에 부딪힐 경우 400t의 무게가 벽에 부딪히는 것과 맞먹는 충격이 가해져 승객들이 압사하거나 화재로 인해 질식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강릉선 KTX 탈선 사고는 직선 주로에서 비교적 저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교각이나 건물 등 다른 장애물과 부딪히지 않아 참사를 피했다. 그럼에도 사고 당시 열차에 타고 있던 채경재(53)씨는 "객실 안이 전쟁터 같았다"고 했다.





[포토]3주간 철도사고 10건…선로 전환기 뒤바뀐 사실 몰랐나

[강릉=정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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