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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기억할 오늘] 갈색 개 폭동(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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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영국 배터시의 1906년 개 동상(위)과 1985년의 개 동상. 새 개가 원래 개의 위엄을 잃고 비굴해졌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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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개 생체실험 반대 활동가들이 1906년 9월 런던 배터시(Battersea)공원 한 켠에 높이 2.29m의 개 동상을 건립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실에서 생체실험 끝에 숨진 갈색 테리어 개 한 마리를 추모하는 동상이었다. 생체실험에 희생당하는 동물들을 추모하자는 게 표면적 의미였지만, 사실은 동물실험을 비판 고발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념비 명판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갈색 테리어를 기념하며/ 1903년 2월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실에서/ 개는 죽음을 맞았다./ 이미 한 차례 생체실험을 겪은 지 두 달 뒤/ 그는 또 다시 생체 실험대에 올려졌다./ 같은 자리에서 1902년 한 해 동안/ 232마리의 개가 생체실험을 당했다./ 영국의 남녀들이여/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게 두려는가?”

앞서 1903년 2월 런던대 의대 실험실에 스웨덴 출신의 런던여대 의예과 학생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 등 두 명이 난입했다. 그들은 스웨덴 반생체실험협회 창립자였다. 당시 실험실에선 개 생체실험을 통해 ‘세크레틴’을 발견한 저명 생리학자 윌리엄 베일리스와 60명의 학생들이 갈색 테리어 개 개복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하게비 등은 쫓겨났고 실험은 마무리됐지만, 하게비가 당일 사건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신랄한 글을 썼다. 협회 회원이던 변호사 스테펀 콜리지가 5월 연례모임 연설에서 그 글을 소개하며 베일리스 등을 비난했고, 그 내용이 찰스 디키스가 창립한 진보지 ‘더 데일리 뉴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베일리스는 그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협회는 소송에서 졌고, 그 대응으로 건립한 게 저 기념비였다.

이번에는 기념비 문구가 문제가 됐다. 런던의대생들이 가장 먼저 반발했다. 동상 수호진영에는 협회와 페미니스트 진영, 노동ㆍ사회주의 진영 활동가들이 섰다. 동상 파괴와 수호를 두고 두 진영이 대치하자 런던 경시청은 대규모 경찰을 동상 주변에 배치, 충돌사태에 대비했다. 옥스퍼드대와 캠브리지대 럭비시합이 열리던 1907년 12월 10일, 동상 파괴 진영 시위대 2,000여 명이 난동을 벌이기도 했다. 개 생체실험을 둘러싼 양측의 대치와 갈등이 지속되면서 경찰 경비 비용이 급증하자 급기야 배터시 시의회는 1910년 3월 동상을 철거했다.

72년 뒤인 1985년 12월, 배터시 공원에는 1903년의 갈색 개와 그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기억하자는 의미의 개 동상이 다시 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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