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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유상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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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수트라 I.42



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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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진개벚나무’란 기호(記號)
며칠 전 밤 사이에 한바탕 눈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나는 공부방에 좌정하여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처진개벚나무’를 한참 보았다. 이 나무는 축 처지는 가지가 특징이다. 마당 왼편에 당당히 자리 잡은 벚나무는 앙상한 가지 위에 무거운 눈들을 가지 위에 업고 미세한 바람에도 리듬에 맞추어 흔들거렸다. 이전에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빅뱅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취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이 나무는 여전히 ‘처진개벚나무’인가?

내가 눈을 통해 관찰한 대상인 이 물건을 나는 ‘처진개벚나무’라고 부른다. 이 처진개벚나무는 그 옆에 서 있는 구상나무도, 소나무도 아닌가? 왜 나는 굳이 이 나무를 처진개벚나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누군가 오래전에 ‘처진개벚나무’라고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였고, 그것을 한글을 사용하는 집단인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처진개벚나무’라는 말과 글은 이 나무의 개성을 드러내는가? ‘처진개벚나무’와 내 눈앞에 우두커니 자리를 잡고 묵묵히 서 있는 이 나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프랑스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일반언어학강의(1916년)'라는 책에서 언어를 기호(記號)로 정의한다. 기호란 어떤 뜻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부호, 문자, 표시다. 건널목에 있는 ‘빨간 신호등’은 자동차 운전자나 보행자에게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라는 의미다. 만일 운전자가 이 기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날 것이다. 그러나 ‘빨간 신호등’이 원래 ‘멈추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빨간 신호등은 멈추라는 상징이란 사실을 동의한 약속이다. 소쉬르는 ‘빨간 신호등’이라는 말을 ‘기표(記標)라고 불렀고 ‘멈추다’는 숨어있는 의미를 ‘기의(記意)'라고 불러 구분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임의적(任意的)이란 형용사를 빌려 설명하였다. ‘임의적’이란 둘 간의 관계가 원래는 상관이 없으며, 한 공동체 안에서 동의하여 맺은 약속이란 뜻이다.

임의성은 당연하다. 인간은 언어로 만물이나 개념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 의미를 축소하여 최소한의 특징만을 담은 문장으로 ‘정의’밖에 할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 음성기호인 ‘배철현’은 아니다. ‘배철현’이란 음가는 철수, 영희 등과 같이 ‘나’라는 인간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이름 없이 공동체 안에서 사는 인간인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내 이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나에게 부여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 이름을 통해 인식한다.

오늘 아침 내 눈앞에 나타난 벚나무는 ‘처진개벚나무’란 이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수많은 특징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벚나무의 가치는 축 처져있다. 가지는 항상 자신이 마지막에 돌아가야 할 땅을 겸손하게 향하고 있지만, 언제나 큰 가지와 수간(樹幹)에 붙어 인내한다.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이 나무만의 특징들이 바로 ‘처진개벚나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담고 있는 수많은 상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들, 매킨토시 컴퓨터, 폰트, 아이패드, 아이폰, 영화 '토이스토리',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 혁신 등 수많은 개념들이 떠오른다. ‘스티브잡스’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진정한 내용들과 의미들이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이 벚나무가 보이는 방에 앉아 명상했다. 나에게 ‘처진개벚나무’는 특별하다. 내가 ‘처진개벚나무’를 식물사전에서 찾는다면, 이 나무를 ‘처진개벚나무’라고 부르는 내적인 특징들이 나열되어있다. 이 특징들의 집합은 처진개벚나무를 구상나무나 소나무로부터 구분되는 개성(個性)들이다. 이 나무는 4월에는 화사하게 연분홍색꽃을 피우고, 가지는 항상 축 처져있다. 이 특징들은 객관적이며, 다른 나무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의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물이나 사람, 혹은 개념은, 그것이 지닌 ‘이름’,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얻는 ‘나에게 진정한 의미’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고하고 규정하는 객관적인 정보로 구성된다.

‘등지(等至)’라고 불리는 ‘삼마팟티’
의식은 투명한 수정과 같다. 요가수련자가 자신의 의식이라는 호수에서 출렁이라는 파도와 물결과 같은 잡념을 잠잠하게 하면('요가수트라' I.33-39), 요가의 궁극적이며 심오한 과정이 펼쳐진다. 의식은 ‘맑은 수정’('요가수트라' I.41)과 같이 되어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의식의 심연에 있는 자신을 더듬어 찾는 정결한 도구가 된다. 그와 같은 의식은 아주 미세한 것부터 우주와 같이 광활한 것까지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요가수트라' I.40)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41'에서 삼매경의 가장 높은 경지를 ‘삼마팟티(samāpatti)'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신라시대 승려 원효는 산스크리트어 ‘삼마팟티’의 발음을 모방하여 ‘삼마발저(三摩鉢底)' 혹은 ‘삼마발제(三摩拔提)'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두 용어 자체는 ‘삼마팟티’가 지향하고 있는 의미를 전혀 알려주지 못한다. 후대에 ‘삼마팟티’는 ‘등지’라는 용어로 해석·정의되었다. ‘등지’란 삼매경으로 진입하여 도착한 가장 높은 경지다.

한자 등(等)은 원래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寺)이 기록보관을 위해 사용한 죽간(竹簡)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순서대로 배열하는 행위를 뜻하는 글자다. 그(녀)는 산란한 마음을 모아 가지런히 가라앉히고 전후좌우상하를 일정하게 배치한다. 한자 지(至)는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단계에 도착한 행위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모아 반드시 그리고 마침내 지극한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삼마팟티’는 ‘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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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수트라' I.42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어떤 대상을 깊이 묵상하여 들어선 경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타트라 샤브다-아르사-즈나나비칼바이흐 산키르나 사비타르카 사마파티흐.”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ṁ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이 단계인 ‘유상등지(有相等至)’에서는 말과 글, 사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낸 주관적이며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 그리고 공적이며 객관적인 의미와 목적이 하나의 개념 혼재되어있다.” ‘유상등지’는 요가수련자의 의식이 한곳에 몰입되어 자연스럽게 외부의 자극들이 소멸되는 상태다. 이때 의식은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상의 대상 안으로 깊이 도달한다.

그 대상은 위에서 ‘처진개벚나무’를 예시로 삼은 것처럼, 다음 셋으로 구성된다. 첫째, ‘처진개벚나무’라는 이름이다.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샤브다(śabda)'다. ‘이름’이란 사람들이 임시로, 그리고 임의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붙어진 명칭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질서와 원칙을 신앙인들은 ‘신’으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성’으로, 스토아철학자들은 ‘자연’으로 불렀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엘로힘’으로, 그리스인들은 ‘세오스(theos)'로, 로마인들은 ‘데우스(deus)'로, 고대 인도인들은 ‘데바(deva)'로, 미국인들은 GOD로, 한국 개신교인들은 ‘하나님’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으로 부른다. 이런 명칭과 ‘신’이란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두 번째 이 명칭은 그 명칭이 담고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대상만이 지닌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드러내기 위한 표식이다. 그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르사(artha)'라고 말한다. ‘아르사’는 어떤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의미가 있다고 만드는 어떤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생존하게 만드는 나의 이상, 삶에 대한 태도, 결심, 개성 등과 같은 것이다. 세 번째는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분 짓는 최소한의 정의다. ‘즈나나(jñāna)'는 그 대상이 지니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요가수련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이 명상을 시도할 때, 그의 의식에 생기는 어떤 것을 ‘개념(비칼파)'이라고 부른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잡념을 제거하고 명상의 최고의 단계인 ‘등지’에서조차, 이름, 그 대상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그 대상의 객관적인 의미가 혼재되어 하나의 개념으로 등장한다고 관찰하였다.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남들이 전해 준 소문을 통해 판단하는가? 아니면 그 대상을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생긴 나만의 정보를 기준으로 가름하는가? 혹은 그 대상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유사한 것들과 비교하는가? 파탄잘리는 등지에 들어선 요가수련자조차, 이 세 가지를 혼재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의식한다고 기록한다.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최예지 ruizhi@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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