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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시댁 싫은 며느리, 응급실로 오라…아프다는데 누가 욕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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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13)
중앙일보

민족 대명절 설을 앞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품 등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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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특별하다. 일 년 내 연통 없던 친척들과 얼굴 맞댈 기회이다. 오랜만에 만난 형수님의 명품 가방을 칭찬하자. 스타일이 좋아요. 옷이랑 잘 어울려요. 당연히 내 팔목엔 그보다 비싼 백이 들려있어야 한다.

조카들 걱정도 잊지 말고 챙겨주자. 가슴에 꾹 눌러온 말을 이참에 꺼내 보자. 만나는 여자는 있냐? 직장은 구했냐? 올해로 몇 살이냐? 월급은 얼마냐? 어느 대학 들어갔냐? 요새는 외모도 경쟁력이다. 살을 빼야 짝이 생긴다. 평소에 차마 못 한 얘기들을 거침없이 꺼내 보자.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잖는가? 기분 나빠하면 그놈이 좀팽이지.

용돈에 야박했던 며느리를 응징할 기회다. 전 부치기로 시작해서,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제사상까지 차려보자. 어차피 입만 놀리면 된다. 손 놀릴 이는 따로 있으니. 한 상 거나하게 차려 조상님께 보은할 기회다. 눈치 없는 아들놈이 부엌을 기웃거리면 “사내대장부가 어딜!” 따끔하게 혼을 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자. 금쪽같은 제 새끼를 혼내다니! 공정한 사람이라고 모두가 우러러볼 것이다.

친지들과 즐기는 명절이 싫다면 해외로 나가보자. 10시간씩 걸리는 귀경길은 남들 얘기. 하늘길은 정체가 없다. 연착은 있어도 막히는 법은 없다. 모히토에서 몰디브를 마시며 뉴스를 열어보자. 시기 질투하는 이들의 열등감만큼 자존감이 높아진다. 손가락질받으면 어때? 내가 번 돈 내가 쓰겠다는데. 억울하면 조상을 잘 만나든가.

이 모두에 해당 사항이 없다면? 어디서도 을이라면? 무얼 해도 불행하다면? 그래도 방법은 있다. 명절 최후의 보루, 어김없이 장날이 서는 곳. 응급실에 가면 된다.

전 부치다 실신을 하거든, 너나없이 건네주는 훈계 덕에 숨이 안 쉬어지거든, 누워서 배만 긁는 남자들 덕에 혈압이 오르거든, 사촌의 땅 자랑에 배가 아프거든, 응급실로 가자. 명절의 고통을 벗어날 유일한 통로. 응급실로 가자. 누가 욕하랴? 아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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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전 부치다 실신을 하거든, 너나없이 건네주는 훈계 덕에 숨이 안 쉬어지거든, 누워서 배만 긁는 남자들 덕에 혈압이 오르거든. 고통을 벗어날 유일한 통로, 응급실로 가자.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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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라 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스트레스는 요망해서 명절엔 실제로 심장병도 늘어난다. 내 마음이 날 속이고, 내 몸은 의사를 속이고. 검사비가 많이 나와도 걱정하진 말자. 양심이 있으면 꼰대들이 내주겠지.

혹여 내주지 않은들 어떠한가? 지옥을 피했는데 병원비가 대수인가? 남편도 자신감을 되찾을 것이다. 집에선 친척들에 기죽어 새던 바가지도, 응급실에선 땅콩 사장이 안 부럽다. 잘난 의사에게도 할 말 다한다. “혼수상태로 실려 왔는데 병명조차 못 찾는 돌팔이들!” 대한민국에서 소비자는 갑이니까.

의사? 일한다는 핑계로 명절에 집에 안 들어가는 얌체들. 고약한 시어머니를 겪을 일도 없다. 명절에 이보다 편한 사람들이 있을까? 사람들 북적이는 걸 보니, 심지어 대목에 장사까지 잘되나 보다. 돈을 아주 갈퀴로 긁고 있을 테다. 그러면서 심지어 고개마저 빳빳하니. 이런 놈들을 가만두면 사회 정의가 바로 서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여보자.

빨리 봐주라. 나부터 봐주라. 친절하게 해주라. 환자가 많으면 침대 수를 늘려라. 의사 수를 늘려라. 서비스 정신 갖춰라. 내가 먼저 왔다. 나부터 봐주라. 몇 시에 왔는데 아직도 안 봐주냐? 해준 것도 없는데 돈 내란 건 웬 말이냐? 도둑놈이 따로 없네. 뛰어와서 설명해라. 두 번 세 번 설명해라. 세 번 네 번 설명해라. 못할 거면 때려치워라. 그러니 처맞지. 툭하면 처맞지. 의사냐? 살인마냐? 울 아버지 살려내라.

행여라도 죄책감은 느끼지 말자. 나만 욕하는 건 아니니까. 한 시간에 너덧 명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잖은가. 어차피 욕먹으면 오래 산다. 명절에 장수를 빌어주니, 이런 덕담이 또 어딨는가. 욕으로 배부를 게 틀림없다. 그러니 끼니도 거르고 저리 뛰어다닐 테지.

둘러보면 온갖 환자다. 진짜로 아픈 사람, 죽기 직전인 사람, 잠깐 쉬었다만 가고 싶은 사람, 자기 몸마저 속인 사람, 피 나는 사람, 찢긴 사람, 부러진 사람, 숨넘어간 사람, 심장이 멎는 사람. 하지만 내 상태가 제일 심각하다. 그런데 의사 놈은 아까부터 나를 본체만체. 가만 보니 죽은 환자를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살아있는 나를 봐줘야지. 혼을 내줄 차례다. 암행어사 출두 시간이다. 큰 소리로 의사를 부르자.

“내가 누군지 알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무려 누구누구와 잘 아는 사이라고!”

사돈의 팔촌 당숙 어르신이라도 이름을 팔고, 얼빠진 의사 놈 표정을 구경하자. 모가지 잘릴까 봐 굽신거리겠지. 혹시나 “그래서 어쩌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침착하게 녹음기를 꺼내 보자. 다른 환자 핑계 대고 부리나케 도망칠 것이다. 확인 사살 시간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 똥 싸고 뒤 안 닦을쏘냐? 민원을 넣자.

“기해년 새해 불친절한 의사를 고발합니다.”

조용수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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