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여교사 꾀임에 13세 소녀 전범기업 공장으로
10개월 간 감금 생활, 12시간씩 가혹한 노동 시달려
귀국 이후 꾸린 가정생활도 파탄
"아흔 목전, 더 늦기 전 日측 사죄와 배상해야"
김정주 할머니. |
[이데일리 이성기 기자] 가네미쓰 아키코(金光 明子).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태평양전쟁 막바지 무렵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에 징용돼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김정주(88) 할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김씨 할머니는 중앙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한약방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었다. 김씨는 “어릴 때 서당에도 다니고 머슴들 방을 둘이나 따로 두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다”고 회고했다.
◇유복한 한약방집 막내딸 운명 바꿔놓은 강제징용
어린 시절 부족할 게 없었던 김씨 인생은 한 순간에 모든 게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농사 지은 쌀은 물론 집안의 놋그릇들까지 모조리 빼앗겼다. 이후 삶조차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것은 일본인 교사의 꾀임이었다. 김씨 언니의 담임이었던 50대 여선생은 “나고야에 먼저 가 있는 언니를 만나고 기술을 배워 돈도 벌 수 있다”고 꾀었다. 1945년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13세 때 일이었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전범기업 후지코시가 인력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자 당시 12~18세 소녀 1000여명을 일본으로 데려간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사건이다.
그 해 2월 여수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김씨는 다른 소녀들과 함께 도야마 소재 후지코시 공장으로 보내졌다. “눈이 엄청 내렸는데 장갑 하나 양말 한짝 주지 않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기숙사에 일주일 정도 머물다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됐다. 김씨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군가를 부르며 공장까지 1시간 가량을 걸어가야 했다. 키가 작던 김씨는 궤짝을 두 개나 쌓고 올라서야 겨우 작업대에 손이 닿았다. 매일 12시간씩 온종일 서서 군함과 전투기 부품을 만드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지만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김씨는 “식사라곤 약간의 밥과 된장국, 채소가 전부라 기숙사 내 풀을 뜯어먹기도 했다”며 “하루가 머다하고 반복되는 비행기 공습에 잠을 잘 때도 운동화를 벗지 못했다”고 했다. 기숙사 공간은 다다미 한 장에 겨우 한 사람 누울 정도. 1층엔 전라도 소녀들, 2층엔 경기도 소녀들 수백명이 여름철 목욕 한 번 못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기숙사에 갇혀 지내야 했다.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2개의 원자폭탄이 각각 투하된 뒤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소식을 알 길 없던 김씨는 해방 이후 석 달이 지난 11월에야 고국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19세 때 결혼을 했지만 달콤한 신혼은 오래가지 못 했다. 근로정신대로 일본에 다녀온 일이 ‘위안부’ 생활을 한 것으로 둔갑해 말이 돌았다. 남편의 의심과 시달림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결국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70년 전 아픔 외면하는 日 정부와 전범기업
서울로 올라온 뒤 김씨는 안 해 본 행상이 없었다. 갖은 고생을 하며 키운 아들의 사업도 기울어 집 나간 며느리를 대신해 갓 돌 지난 손주를 맡아 돌봐야했다. 그 손주가 벌써 20대 중반의 청년이 됐지만 몸이 약해 군대를 못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탠다.
그간 사죄와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것만 십여 차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지역구 의원 사무실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김씨는 “일본에 재판하러 다닐 때 우리를 도와준 것은 현지 시민단체나 변호사 등 일본 사람들이었다”며 “‘너희 나라 국회의원들은 무엇하느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우리 목소리를 외면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 등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도야마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재판소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11년 이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래픽=이동훈 기자. |
그러나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이 신일본제철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없고, 일본 법원 판결의 국내 효력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자 이후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이 제기됐다. 201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1심 재판부는 후지코시의 책임을 인정해 피해자 1인당 8000만원에서 1억원씩, 모두 15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1심 판결 후 후지코시 측은 항소했고 지난해 12월까지 5년 가까이 재판은 지연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사법부와의 사법 농단 탓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지난해 10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중단됐던 후지코시 재판도 재개됐다. 최근 2심 재판부도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일본 정부가 전범기업들을 적극 변호하며 국내 법원의 판결에 반발하는 가운데, 후지코시는 현재 상고한 상태다.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임재성·김세은 변호사는 지난 15일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후지코시 본사를 찾아 협력 요청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이들은 후지코시 측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
“배상 촉구 시위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올해 문재인 정부에서 일본 측의 사죄와 배상이 꼭 해결됐으면 한다.”
올해 미수(米壽·88세)인 김씨의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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