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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마지막까지 패션쇼 준비했다...전설이 된 ‘샤넬의 제왕’, 칼 라거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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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아웃사이더에서 럭셔리 패션 아이콘으로
샤넬, 펜디 등 브랜드 혁신 이끌어 ‘패션의 제왕’ 칭호
‘선글라스에 꽁지머리’ 트레이드마크…서울서 패션쇼 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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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트가 19일(현지시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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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윌 22일, 파리에서 열린 샤넬 오뜨꾸띄르(고급 맞춤복) 패션쇼가 끝난 후 패션계가 들썩였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심신이 지쳤다’는 이유로 패션쇼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샤넬 패션쇼 피날레에 칼 라거펠트가 서지 않은 건 그가 샤넬을 맡은 35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건강 악화설과 은퇴설 등 추측이 난무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4주 후인 지난 19일(현지시간), 칼 라거펠트는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췌장암. 외신에 따르면 그는 측근에게만 자신의 병환 알린 것으로 전해진다. 알랭 베르트하이머 샤넬 CEO는 성명을 통해 "그는 창의력과 관대함, 탁월한 직감으로 시대를 앞서갔고, 샤넬의 세계적인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며 "나는 오늘 친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창조적 감각까지 모두 잃었다"라고 그를 기렸다.

패션계 동료들도 그를 추모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은 "소중한 친구의 죽음에 무한한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파리를 전 세계의 패션 수도로 만들고 펜디를 가장 혁신적인 브랜드로 일군 창의적인 천재를 잃었다"고 했으며, 이탈리아 명품 베르사체의 수장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우리는 당신의 놀라운 재능과 끝없는 영감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샤넬의 뮤즈로 여러 번 패션쇼에 섰던 한국 모델 수주는 "당신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며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 "죽은 샤넬이 환생했다" 파리 패션의 제왕이 된 독일인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부흥을 이끈 인물로, 현대 럭셔리 패션 산업 원형(原型)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름에는 ‘패션의 제왕’, ‘파리 패션의 귀족’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1986년 황금골무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6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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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샤넬 데뷔 패션쇼에서 칼 라거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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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독일에서 태어난 칼 라거펠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신진 디자이너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며 파리 패션계에 입문했다. 피에르 발망, 장 바투를 거쳐, 1964년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1965년에는 이탈리아 모피 패션 브랜드 펜디에 합류해 브랜드 혁신을 주도했다. 그는 고루한 이미지의 모피를 현대적인 패션으로 변화시키고, ‘더블 F’ 로고를 개발해 펜디를 세계적인 종합 패션 브랜드로 키웠다.

샤넬과의 인연이 시작된 건 1982년 오뜨꾸띄르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면서다. 당시 샤넬은 창업자인 가브리엘 샤넬이 죽은 후 노후 브랜드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였다. 독일인으로, 기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한 라거펠트의 경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1983년 1월 오뜨꾸띄르 패션쇼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엔 기성복까지 감독하며 본격적으로 샤넬 제국을 재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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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시대정신의 접목은 칼 라거펠트 디자인의 핵심이었다. 사진은 페미니스트들의 시위 현장을 재현한 2015년 봄/여름 패션쇼에서 칼 라거펠트./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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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과 시대정신 조합해 샤넬 혁신 이끌어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이 만든 유산에 동시대의 취향을 섞어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브랜드로 샤넬을 재창조했다. 예컨대 트위드 수트의 치마 길이를 잘라 현대적인 비율을 제안하거나, 클래식한 정장을 길거리 문화의 상징인 데님과 접목하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최고의 수공예 공방과 협업해 프랑스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로서 명성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이와 관련해 라거펠트는 "샤넬의 이상은 품위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품위’가 지루함으로 여겨지게 된 때가 왔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은 오늘날에 어울리는 재미있는 샤넬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과거는 이상일 뿐이다. 과거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죽게 된다"고 말했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라거펠트는 1987년부터 직접 광고 사진을 찍고, 브랜드를 위한 단편 영화를 연출했다.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패션쇼 연출도 이목을 끌었다. 슈퍼마켓, 공항, 우주정거장, 파도치는 인공해변 등 상상을 초월한 무대 연출은 샤넬 패션쇼의 또 다른 볼거리였다.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빅뱅의 지드래곤, 모델 수주, 배우 송혜교 등을 뮤즈로 패션쇼와 광고 캠페인을 선보였고, 2015년에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조각보와 색동저고리, 한글 등 한국 전통문화에서 영감받은 크루즈 패션쇼를 열었다. 2018년 10월 프랑스를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이 패션쇼에 등장했던 한글 재킷을 입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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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크루즈 컬렉션. 조각보와 색동저고리 등 한국 전통 문화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을 선보였다./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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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선글라스와 백발의 꽁지머리, 바짝 선 칼라, 손가락이 없는 가죽 스팽글 장갑 등은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다. 2000년 에디 슬리먼이 디자인한 슬림한 디올 옴므 수트를 입기 위해 13개월 동안 42kg를 감량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4년에는 자신의 스타일을 담은 개인 브랜드 ‘칼 라거펠트’를 론칭했다. 이 밖에도 코카콜라, H&M, 토즈, 스와로브스키, 푸마 등 대중 브랜드와 협업해 ‘럭셔리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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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틀 블랙 재킷’ 사진집을 위해 칼 라거펠트가 찍은 배우 송혜교./샤넬


◇ 최후의 순간까지 패션쇼 준비한 일 중독자

라거펠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샤넬, 펜디, 칼 라거펠트 등 3개 브랜드를 지휘했다. 샤넬에서만 1년에 여섯 번의 패션쇼를 진행하는 등 빡빡한 일정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은 일"이라 말했을 만큼, 그에게 일은 숨 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휴가도 가지 않고 일에만 전념했다. 건강이 악화된 최근까지도 오는 3월 열릴 여성복 패션쇼를 준비했다.

유일한 취미는 독서였다. 자택에 있는 30만 여권의 책과 직접 운영한 서점 '7L’은 그의 지적 욕구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반려묘 ‘슈페트’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 개인 집사와 주치의를 두고 애지중지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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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중독자였던 칼 라거펠트의 유일한 취미는 독서였다. 그는 “독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럭셔리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토드 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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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중독자에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내 옷은 마른 여자들을 위한 옷"이라며 깡마른 몸매를 예찬하는가 하면, 패션계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바지를 벗기 싫으면 모델을 하지 말고 수녀가 돼라"라고 말해 반발을 샀다. 패션업계가 반(反) 모피 운동으로 떠들썩할 땐 "사람들이 육식을 하는 한 모피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며 모피 사용을 고수했다.

한편, 샤넬은 2017년 전년 대비 11% 증가한 96억2천만 달러(약 10조8561억원)의 매출을 거뒀고, 영업이익은 26억9천만 달러(약 3조356억원)를 기록했다.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는 루이뷔통 다음으로 매출 규모가 크다. 라거펠트를 이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는 30여 년간 라거펠트와 함께 샤넬을 이끌어 온 비르지니 비아르 부수석이 임명됐다.

[김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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