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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문화프리즘] 하이퍼리얼리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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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대한민국 평균 통근 시간은 53분이라고 한다. 집을 나서 1시간 이내에 직장에 닿으면 그나마 평균적인 직장인이라는 이야기다."

최근 출간된 문학 격월간지 '릿터' 2·3월호의 에디토리얼에서 인용한 문구다. 이번 호의 주제는 '출퇴근길'이다. 이 글을 쓴 서효인 편집장은 매일 평균 이상의 거리를 달려 회사에 도착한다. 파주에서 가로수길까지. 편도 1시간이 넘는 길을 오가며 매일 음악을 듣다 보니 그는 K팝과 아이돌 전문가가 됐다. '웃픈' 사연이다.

문학잡지가 어떻게 '출퇴근길'이라는 사회과학적인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 싶지만, 정작 실린 글을 읽노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릿터'에는 신선한 시도가 많다. 초단편 소설 '플래시 픽션'이 그중 하나다. 매호 정해지는 현실과 밀착한 주제를 다룬 두어 장 분량의 소설을 싣는다. '출퇴근길'을 다룬 첫 소설은 박유경의 '손의 안위'다. 피트니스와 뷰티스쿨, 성형외과가 빽빽한 압구정역에서 "대출 신청 후 10분 이내 입금"이란 문구가 새겨진 대출 콜센터 명함을 뿌리는 은수의 이야기.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비싼 명품백에 칼집이 난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다. 일 때문에 커터칼을 들고 다니는 은수는 눈앞의 칼집 난 가방을 보고도 의심을 당할까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유지의 '졸업 연주회'는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로 시작된다. 석류는 신입사원에게 검은색 코트가 바뀌었으니 돌려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오늘은 친구가 7년 만에 하는 졸업연주회에 가는 중요한 날. 코트를 퀵서비스로 돌려보내고 초겨울 날씨에 스웨터 차림이 된다. 추위에 떨며 공연장으로 걸어가면서 석류는 자신의 반짝이는, 달콤한 이름이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싸구려 코트와 달리 소라 씨의 캐시미어 코트에는 바이올린 거장의 티켓이 들어 있었다.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은 졸업 후 인턴과 계약직으로 2년을 일한 끝에 정규직에 취업한 나의 첫 출근길 풍경을 그렸다. 대기 1번으로 뽑혀 추가 합격. 연봉도 많이 올랐다. 2663만원이니 세후 월 201만원을 받게 된다. 매달 월세 60만원에 관리비 7만원, 인터넷 1만원, 핸드폰 요금 7만원을 내고 있다. 결혼 자금으로 적금 55만원을 붓고 있고, 실비 보험 12만원을 낸다. 출근을 앞두고 새 옷과 구두를 사는 데 17만원을 썼으니, 남은 돈은 겨우 35만원이다. 교통비를 포함해 하루에 1만1000원씩 쓰면 된다. 빠듯한 출근길, 2000원이 더 비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다 택시를 타게 된 꼬이고 꼬인 출근길의 고민과 분노와 희망의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달 전, 대형사고를 친 장류진 작가였다. 판교 스타트업의 세계를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했던지 아직 책으로 나오지도 않은 창비신인상 수상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인터넷에 공개된 뒤 창비 서버를 다운시켰다.

중고 거래 스타트업인 우동마켓의 직원 안나가 아이디 '거북이알' 님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제목만큼이나 짠했다. 안나는 연예인 병에 걸린 회장보다 먼저 공연 소식을 SNS에 올리는 바람에 카드 포인트로 월급을 받게 된 거북이알의 사연을 듣고 쓸쓸해진다. 안나를 위로하는 건 조성진 채팅방이다. 누군가가 보내온 문구에 마음이 녹는다.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오늘도 축 늘어진 어깨로 출퇴근을 견디는 직딩에겐 최고의 '덕담'이다. 이 소설엔 '하이퍼리얼리즘 문학'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신인 작가들의 실험장인 플래시 픽션에도 같은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출퇴근길 사람들의 손에 시집이나 소설책이 들려 있길 바라는 건 비대한 낭만성에 근거한 소원에 불과할 것이다." 서 편집장은 이렇게 걱정했지만, 젊은 작가들의 실험과 노력이 빛을 본다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사람들의 손에 다시 시집과 소설책이 들려 있는 날이.

[문화부 =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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