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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책과 미래] 봄은 언제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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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입춘대길(立春大吉).

봄이 나타나니 크게 길하리라. 문에 붙은 글씨가 씩씩하고 정갈하다. 삿된 기운은 그치고, 더러운 먼지는 돌아서라. 강병인 선생의 글씨다. 글자는 뜻을 전하는 수단이지만, 글씨는 인간을 세우는 예술이다. 선생은 기계 글자로 가득한 차디찬 세상을 인간의 글씨가 넘치는 따뜻한 세계로 바꾸는 일을 지금껏 해 왔다. 작은 인연을 기억해 해마다 기운찬 글씨를 보내는 선생으로부터 항상 나의 봄은 시작한다. 나아가 방을 단단히 붙이고, 돌아와 시를 읽으며 봄을 맞이한다.

퇴계의 봄은 언제 시작되는가. 근심 가득한 한밤중, 홀로 잠 깨어 서성이는데, 바람이 매화 향기를 뜰에 채울 때다. 기적을 만난 입술이 감탄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이룩한다. "홀로 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獨倚山窓夜色寒)/매화가지 끝에는 보름달이 둥글둥글(梅梢月上正團團)./애써 부르지 않았건만 산들바람 이르러(不須更喚微風至)/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하네(自有淸香滿院間)."

한밤에 일어서 세상의 기미를 살피는 이는 분명히 봄을 먼저 겪으리라. 하지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봄은 온다. 창자가 타고 간이 끊일 듯 근심하지 말라. 마음을 단정히 하고, 몸을 든든히 단련하면서 우주의 기척을 기다려라. 시간은 반드시 해결책을 내뱉는다.

다산의 봄은 언제 시작되는가. 무채색 겨울이 지나 갖가지 생명이 색깔을 내뿜을 때다. 바람의 운동을 빌려 보리가 춤을 추고, 모내는 소리에 맞춰 입술이 시를 탄다. "무논에 바람 부니 보리물결 넘실대고(水田風起麥波長)/보리타작하고 나니 모내기가 시작되네(麥上場時稻揷秧)./눈 맞을 때 배추는 새잎이 푸르고(숭菜雪天新葉綠)/섣달에 깐 병아리는 어린 털이 노랗구나(鷄雛사月嫩毛黃)."

한겨울 쌓인 눈은 초록을 안고 있으며, 갓 태어난 병아리는 노랑을 배고 있다. 지는 해는 밤을 지내면 기어이 떠오르고 이지러지는 달은 날을 보내면 반드시 차오른다. 하늘은 한시도 쉬지 않으니 씨앗을 품고 흐름에 부응하면, 언젠가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으리라. 이것이 하늘의 법칙이다. 봄이 일어선 지 세 주가 지났다. 눈발이 빗물로 바뀐다는 절기도 나흘 전이었다.

인간사의 어떠한 일도 차오르는 봄을 막지 못한다. 바람은 여전히 매섭지만 마음의 얼음은 벌써 풀렸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올 때마다 따스한 볕이 산책을 부추긴다. 나의 봄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봄은 언제 시작되는가. 다음 주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에서 봄을 보고 싶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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