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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83〉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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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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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 ― 이상국(1946∼ )

큰눈 온 날 아침
부러져 나간 소나무들 보면 눈부시다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자해
혹은 아름다운 마감
나도 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착한 것보다 나쁜 것이 확실히 힘이 세다. 착한 것은 천천히 지속되며 은은하지만 나쁜 것은 순간에 강하며 강렬하다. 사람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의도,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랜 시간 착한 사람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착한 방향으로는 잘 흘러가지 않았다.

나쁜 것들의 결정타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착함의 존재를 잊게 된다. 잊으면 잃게 되는 법.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해 시를 읽는다.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의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따뜻한지를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상국 시인은 강원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길게 머물렀다. 이 시도 강원도, 아마 설악산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강원도는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진 나무 따위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한 나무에서 시인은 일종의 투쟁을 발견한다. 위대한 헌신도 발견한다. 찢어진 소나무의 마음을 짐작하며 시인은 경의를 표한다.

이 시의 탄생은 3·1절과 무관했지만 읽는 우리의 마음은 유관하다. 시에 등장하는 소나무들은 3·1절의 주인공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 맞선 사람이었고,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착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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