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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삶과 문화] 숫자 3과 사회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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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숫자 3에 대해 생각한다. 3이라는 숫자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고 그 나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삼각함수, 삼위일체, 삼권분립, 제3세계 등 숫자 3이 포함된 상용어는 매우 많다. 모두 중요한 개념이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화시켜 본다면, 숫자 3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도 있다. 가령 세 명 중 한 명이 강력한 지도자고 나머지 두 명에게 강압적으로 똑 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다. 반면 세 명이 각각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다수결로 의사결정하고 소수를 존중해주는 것은 민주주의다. 3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세 번은 겪어야 확신이 생기고, 공정성을 기하려면 세 번 정도의 절차는 거쳐야 한다. 그래서 재판은 삼심제고, 삼세판으로 결정하면 시비가 줄어든다.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중요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본원리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다. 이럴 경우에는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 하지만 삼각구도가 때로는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될 때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정치지형에서 양당구조가 아니라 삼당체제일 때에는 복잡한 셈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3이라는 숫자는 양면성을 갖는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아무리 잘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타협한다.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라고 할 때의 ‘사회적 관계’는 적어도 셋 이상을 전제로 한다. 두 명 간 관계는 상호관계고, 세 명 이상 간 관계는 사회적 관계다. 세 명이 모인 집단은 가장 작은 규모의 사회다. 친구 셋이 서로 잘 지내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아무리 친해도 서로 생각이 달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바로 사회성이다.

단 세 명이라도 그 힘이 작지 않다. 셋이 단합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고전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아토스, 프로토스, 아라미스 등 검객 세 명이 외쳤던 구호는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였고, 힘을 합친 삼총사는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세 명이 모이면 심지어 없던 일도 지어낼 수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 전국시대 신하 방공이 왕에게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겠느냐”라고 물으니 왕은 “당연히 안 믿는다”고 말했고, “두 명이 외치면 믿겠느냐”고 물으니 “그래도 안 믿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세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면 믿겠느냐”고 물으나 “그러면 믿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여러 번 거짓된 말을 되풀이하고 셋이 말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밀그램 역시 실험을 통해 이상행동이라도 3명 이상이 같이하면 군중심리가 발동되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3인이 모이면 학습이 가능하다. 공자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 有我師)’라고 가르쳤다. 세 명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사회적 의미에서 사람이 잘 산다는 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세 그룹으로 나눠진다. 나에게 우호적인 그룹, 무관심한 그룹 그리고 적대적인 그룹이다. 아무리 해도 모두 내편이 될 수는 없다. 무관심한 사람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고 적대적인 사람을 줄이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는 게 현명한 삶일 것이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문화협력단장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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