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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백제 무왕이십니다”…뼛조각에 학자들 고개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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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⑧ 뼈가 말하는 고대사 (하)

익산 쌍릉 주인 놓고 오랫동안 논란

2009년 미륵사탑 사리봉안기 발굴로

<삼국유사>의 ‘무왕-선화공주설’ 깨져

2018년 쌍릉 재발굴 때 나온 뼛조각

고고, 역사, 법의학자 등 공동 연구

과학적 접근으로 “무왕 왕릉” 확정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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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백약이 무효였다. 왕후의 극진한 간호도, 불공도 소용이 없었다. 젊었을 때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허리로 인해 보행에 조금 불편함이 있었는데 고령에 접어든 요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척추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사택씨 출신의 왕후는 거금을 들여 미륵사 서편에 웅장한 석탑을 건립하였다. 639년 1월29일 석탑의 심초석(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가 되는 돌) 안에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보물과 고위관료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보물들, 그리고 부처님의 사리를 함께 모셨다. 왕후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순금제 판의 앞뒷면에 총 193자를 새겼다. 그 내용의 핵심은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은 긴 세월 동안 선행을 쌓아서 지금 생에서 특별한 보답을 받으셨습니다. …(중략)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처럼 굳건하고, 보위는 천지처럼 오래가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후략)”란 글귀였다. 그러나 2년2개월이 지난 641년 3월 대왕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붕어하셨다. 재위한 기간만 40년이 넘고 60살을 넘기셨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편이지만, 젊을 때 산을 뒤져 마를 캐면서 얻은 건강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유사>는 마를 캐서 팔던 이 청년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얻고 백제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출생에서부터 왕이 되는 과정이 수수께끼투성이인 무왕(600~641년 재위)이 바로 그분이다.

대왕의 장례는 왕실에 퍼져 있던 유교식 의례에 따라 치러졌고, 가장 좋은 재질의 돌로 잘 가공한 판석을 조립하여 대왕릉에 걸맞은 커다란 돌방무덤(석실묘)이 만들어졌다. 그 위치는 선대왕들을 모신 웅진이나 사비가 아니라, 대왕이 살아생전 온 힘을 다하여 건설한 새로운 왕도 금마저로 정해졌다. 일본에서 가져온 최고급 금송을 가공한 판재에 검은 옻칠을 하고, 금동판으로 장식하고 금동제 못으로 조립하였다. 대왕의 시신을 모신 관은 무덤 중앙에 큰 판석 1장으로 만든 관 받침 위에 모셔졌다. 왕릉의 문이 닫히면서 장례는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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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 얘기는 신화인가?

백제의 금마저에 해당되는 전라북도 익산에는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대왕릉과 소왕릉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큰 무덤이 알려져 있었다. 쌍릉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덤들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1327년경에는 대왕릉 도굴사건이 벌어져서 범인들이 수감되었으나 2년 만에 탈출하여 사회문제를 야기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쌍릉에 백제 무왕 부부가 묻혀 있다고 생각되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지난 1917년 12월 한겨울에 야쓰이 세이이치란 일본인 고고학자가 대왕릉의 문을 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자행된 도굴로 인해 무덤 내부에는 부장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고 무덤의 문은 다시 닫혔다. 하지만 무덤의 규모가 워낙 대단하였기 때문에 백제 말기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란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이때 수습된 사람의 어금니 몇개와 목관의 잔편, 그리고 목관 장신구 몇점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쌍릉에 묻힌 사람은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즉 선화공주임이 이후 널리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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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미륵사지 서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봉안기는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이고, 두 분의 발원에 의해서 미륵사가 조영되었다는 <삼국유사> 기사에 기초한 13세기 이래의 정설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백제 왕후가 사택적덕의 따님이고 이분에 의해 639년 서탑에서 사리 봉안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학계는 이윽고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는 허구인지, 미륵사 창건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둘러싼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연히 쌍릉 중 왕비의 무덤이라고 하는 소왕릉에 묻힌 분이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도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국립전주박물관 관장이던 이주헌은 대왕릉에서 출토된 어금니를 분석한 결과 여성의 것이라고 판정되었기 때문에 이 무덤은 결코 무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대왕릉이 사택왕후, 소왕릉이 무왕의 무덤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미륵사 창건과 쌍릉의 피장자를 둘러싼 대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재발굴조사에 들어갔다. 2018년 3월 대왕릉의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간 조사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관 받침 위에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작게 조각난 사람의 뼈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야쓰이의 조사에서는 전혀 발표되지 않았던 이 유골함과 뼈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화공주의 것일까? 사택왕후의 것일까? 대왕의 것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후대의 엉뚱한 사람의 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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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반뼈에 남은 무왕의 낙상 흔적

이번에는 가톨릭대 응용해부연구소가 나섰다. 작게 조각난 뼛조각들을 컴퓨터단층촬영 하고, 형태적으로 구분되는 102개 정도를 집중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드디어 2018년 7월17일 오후 가톨릭대 병원에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다. 부검용 테이블 위에는 실제의 인골, 그리고 약해진 인골의 상태를 고려하여 입체(3D)프린팅한 모형이 함께 놓여 있었다. 연구를 주도한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장의 취지 설명에 이어 인골감정을 실시한 이우영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 분석 발표가 이어졌다. 이 뼛조각들은 여러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것이며, 키가 161~170㎝ 정도로서 상당히 큰 편인 육십대 이상의 남성, 생전에 낙상한 결과 골반뼈에 골절이 생겨 후유증을 앓은 사실, 늙어서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DISH, 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이라는 병에 걸려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안고 살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병은 인대가 골화(뼈처럼 되는 현상)되는 희귀질병으로서 50살 이상의 남성에게 발병할 가능성이 높으며, 원인이 분명치 않으나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로 생길 수 있다는 부연설명도 덧붙였다. 법의학자들은 종전 연구에서 어금니를 여성의 것으로 본 주장에 반대하고 연령이 많은 점은 분명하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연대측정을 담당한 팀은 정강이뼈에서 떼어낸 시료를 분석하여 이 인골의 주인공이 숨을 거둔 시점은 620~659년 사이일 가능성이 68%라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임산공학 전문가는 유골함의 수종이 1917년 야쓰이가 조사 종료 후 돌문을 닫을 때 사용한 나무쐐기와 같은 수종임을 밝혀냈다. 야쓰이가 흩어져 있던 인골을 수습하고 부랴부랴 제작한 나무함에 넣어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공주대 정재윤 교수는 이 인골의 주인공이 노년에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으로 고생한 사실과 사택왕후의 기원이 담긴 금제 사리봉안기에서 유독 대왕의 건강을 기원한 사실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고고학 전공자들이 가세하였다. 대왕릉의 규모는 왕릉급임이 분명하고 그 연대는 7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모든 의견을 종합해 보았다. 7세기 전반에 사망한, 평균 이상으로 큰 키의 노년 남성, 고급스러운 음식을 장기간 섭취한 결과 발생한 질병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으로 장기간 투병한 병력, 익산이란 신도시에 묻힌 백제의 왕.

무왕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이상준 소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인골을 백제 무왕의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모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네.” 발굴조사를 주도한 원광대 최완규 교수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여러분, 백제 무왕이십니다. 예를 표하시죠.” 참가자들은 뼛조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왕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표하였다. 다음날 오전 모든 언론에서 ‘백제 무왕의 무덤 확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었고, 이 사건은 2018년도 고고학, 고대사 연구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었다. 이 과정에 참여하였던 필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고대사 최대의 난제를 해결하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곤 한다.

올해에는 소왕릉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획되어 있고, 자신의 견해를 가다듬은 이주헌의 본격적인 반론도 제기될 예정이다.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허구일까?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의 관계는? 두 분이 모두 부인이었을까? 백제사 최고의 미스터리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을 기대해 본다.

인골 연구를 통하여 특정 인물의 신원을 정확히 밝힌 무왕의 경우는 매우 극적이며,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 신원 파악에 실패하더라도 고인의 직업이나 생전 습관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는 많다. 남해안의 통영 욕지도란 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사람 뼈에서 외이도골종이 확인된 적이 있었다. 장시간 잠수를 한 결과, 수압으로 인하여 뼈에 생긴 염증이 점점 딱딱해지면서 외이도를 막는 병이다. 잠수부와 해녀에게 많이 발생하는데 지금이야 외과수술로 치료가 되지만 당시에는 심한 난청에 시달렸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직업병 중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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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뼈의 콜라겐으로 식습관 분석

고인골 전공자인 서울대 이준정 교수는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하여 흥미로운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안정동위원소 분석이란 살아생전 섭취한 식료의 종류에 따라 특정한 안정동위원소 정보가 뼈와 치아에 기록되며, 시간이 흘러도 그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따른 분석이다. 전북 완주 은하리의 6세기 무렵 백제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한 남성의 뼈에서 콜라겐을 추출하여 분석해보니 벼, 보리, 콩 등의 식물성 식료는 많이 섭취한 반면 육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덤의 규모를 볼 때 상당히 높은 귀족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무언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까다로운 식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으나, 당시 백제 사회에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29대 법왕은 599년에 명령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사냥용 매를 풀어주고,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는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살생 자체를 금지한 셈이니 육식문화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고위 관료들은 왕의 명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당진 우두리에서 역시 6세기 대의 돌방무덤들이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인골들은 어패류를 다량 섭취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을 한껏 살린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한 또 다른 무덤에서는 여러 명이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었는데 두개골 외상, 쇄골 골절, 견갑골 탈골 등 다양한 부상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뼈가 변형된 양상도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보건·위생 환경에 처해 있었던 셈인데, 어패류 섭취는 매우 적고 반대로 육상동물을 많이 섭취한 모습을 보인다. 신분이 낮은 집단은 사냥을 통하여, 그보다 높은 집단은 어패류를, 더 높은 귀족은 채식만 하던 이상한 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뼈는 1000년이 지난 과거의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털어놓는다. 단, 우리가 그 비밀을 들을 적극적인 자세와 치밀한 준비를 갖추었을 때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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