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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배연신굿·대동굿' 큰무당 김금화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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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역량에 나라굿 주재

세계적 명성···美 순회공연도

서울경제


국가무형문화재 제82-2호로 지정된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큰무당 김금화씨가 23일 오전5시57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31년 황해도 연백의 가난한 집안에서 5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2세 때 무병(巫病)을 앓았고 14세에 정신대를 피해 결혼했다가 고된 시집살이로 2년 만에 파경을 맞아 친정으로 돌아온 후 17세이던 해 신내림을 받았다. 그는 외할머니이자 만신(萬神·무녀)인 김천일씨에게 내림굿을 받고 강신무(降神巫)가 됐다.

“나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몸의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그 순간 내 몸 안으로 신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환영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이, 배고픔이, 아픔이, 원망이 뜨거운 눈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갔다.” (김금화 자서전 ‘비단꽃 넘세’ 중에서)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한 고인은 무당이 하는 굿 중 가장 규모가 큰 대동굿과 나라굿을 주재할 만큼 기량이 뛰어나 19세에 독립했다. 인천과 경기도 이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65년 서울로 활동지를 옮긴 그는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 연기상을 받으며 민속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어장의 풍어(豊魚)를 기원하는 ‘서해안 풍어제’로 명성을 날렸다.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굿이 미신으로 인식되면서 고인은 멸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민속학 및 민화 연구자였던 조자룡 전 에밀레박물관 관장 등은 오히려 그를 주목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문화사절단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녹스빌 국제박람회장의 친선공연에서 ‘철무리굿’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고인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됐다. 미국 순회공연 후 스페인·러시아·오스트리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과 중국과 일본 등지에 신비로운 우리 굿을 알리는 전승 활동을 펼쳐 서구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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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로 인정됐다. 황해도 해주·옹진·연평도에서 성행하며 서해안 풍어제의 맥을 이은 배연신굿은 배의 안전과 풍어를 빌며 바다에 배를 띄워 벌이는 굿이고 대동굿은 마을 공동 제사를 뜻한다. 이들 굿은 신비스러움과 연희적 요소가 잘 조화된 게 특징이다.

고인은 1998년 임진각에서는 통일맞이 굿을 벌였고 백두산 천지에서의 대동굿을 진행했다. 또한 독일 베를린에서 윤이상을 위한 진혼굿을 하고 사도세자의 진혼제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한 진혼제를 지냈다. 지난 2014년 인천평화축제에서는 세월호 희생자의 추모위령제를 지내는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무당으로 활발한 전승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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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00년에는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에 취임했고 2005년 인천 강화도에 무속 시설 ‘금화당’을 열어 후진 양성과 무속문화 전수에 힘썼다.

2013년에는 고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단꽃길’이 개봉했고 2014년에는 미디어아티스트 박찬경이 고인의 일생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 ‘만신’이 개봉돼 무속문화가 화제가 됐다. 이 영화는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받았다.

팔순을 넘기고도 서슴없이 작두에 올랐던 고인은 국립무형유산원이 2017년 펴낸 구술록에서 “무당은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 남의 덕을 잘 빌어주려면 내가 먼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황훈(자영업)씨가 있다. 조카 김혜경씨는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이수자다. 빈소는 인천시 동구 청기와장례식장, 발인은 25일 오전6시40분, 장지는 인천 부평승화원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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