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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자의 반 타의 반…'몰카' 피해자들에 강요된 '침묵' [뉴스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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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 신고해도 경찰은 시큰둥 / ‘몰카’ 피해자 10명 중 3명 법적대응 포기 / 정준영 사태로 본 온라인 성폭력… 피해상담 342건 분석 / 신고해도 경찰은 시큰둥 / “큰 사안 아니다” 무고죄 역고소 / 50% “가해자 낮은 형량에 불만” / 2차 피해 없게 제도 개선 필요

세계일보

#. A씨는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성관계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 게시물을 검색했다. 해당 영상은 전 남자친구가 A씨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한 것으로 남자친구와 본인의 모습이 확실했다. 이미 같은 영상이 수 십 개가 퍼져있는 상황. A씨는 신고를 하러 갔으나 담당 경찰은 “당신 신체에는 점이 많은데 영상에는 점이 안보이니까 본인임을 인정받지 못해 자칫하면 무고죄로 역고소 당할 수 있다”며 “신고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경찰의 말에 위축돼 그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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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 사태’로 가수 정준영(30)씨의 성관계 불법 촬영 및 단체 카톡방 유포 사건을 경찰이 수사 중인 가운데 성적 비하 댓글이나 합성사진 및 불법 촬영물 유포 등 ‘온라인 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에도 그동안 이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4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피해자 지원단체인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및 디지털성폭력아웃을 통해 온라인 성폭력 피해상담 342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이는 45.0%가 연인 등 ‘친밀한 관계’였고 친구 등 주변지인과 학교 선후배, 직장동료 등 ‘아는 관계‘가 12.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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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해자 10명 중 3명 꼴로 피해사실을 인지하고도 사법처리를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당수가 ‘누군가가 피해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36.7%)였고 ‘가해자 처벌보다는 삭제가 더 중요하다’(28.9%)는 이유로 법적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이밖에 ‘사법처리 기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21.1%)와 ‘경찰이 사건수리를 거부하거나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서’(15.6%) 등 사법처리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사법처리를 하더라도 피해자의 절반 정도가 ‘피해에 비해 낮은 형량’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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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은 신고와 처리 절차 등에서 성감수성이 결여된 경찰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대응의 가장 큰 문제로 경찰들이 신고도 하기 전에 “큰 사안 아니다”, “접수해도 처벌 안될 사건”이라 자체적으로 ‘사전판단’을 해 신고나 법적처리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상담에 참여한 피해자 B씨는 “큰 용기를 내서 경찰서를 갔더니 경찰이 ‘내 경험상 이건 어차피 안 돼’라면서 귀찮아 했다”며 “‘굳이 이래야하나. 아직 학생이고 초범인데 너무 한 거 아니냐. 내가 혼낼테니까 좋게 좋게 해결하라’며 합의를 종용하더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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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유포자를 찾아 신고하더라도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면 사실상 신고가 어렵다. 지난해 12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 법정형이 개정되면서 비동의 촬영자 뿐만 아니라 유포자도 최대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됐다. 그러나 피해자가 유포자의 성명이나 계좌번호 등을 자력으로 찾지 못해 수사진행이 더뎌지는 경우가 있어 피해자가 직접 구입을 문의해 유포자의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온라인 성폭력 수사에서 촬영물 압수 및 폐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이 정준영씨의 1차 불법 촬영 사건을 수사하던 당시 ‘휴대전화가 복원불가하다’는 말만 믿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과 정씨가 최근 제출한 3대의 휴대전화 중 한 대가 공장 초기화된 상태로 증거 인멸 시도가 있었음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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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온라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온라인 성폭력의 경우 직접적 신체 피해가 있지 않다보니 언어적·이미지상 피해나 명예훼손 정도로 판단해 형량이 낮아진다”며 “그러나 피해 정도 고려하면 처벌은 일반 성폭력과 동일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 차원에서 제도의 허점을 찾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윤덕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본적으로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는 행동을 범죄로 인지하지 못하고 놀이로 생각하는 태도를 고쳐야한다”며 “우리 사회 전반적인 성감수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학교와 사회에서 성인권교육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강조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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