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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누구를 위해 한 건 없어, 함께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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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 한국인 신부 ·한국 치즈의 아버지·임실 지씨 시조, 지정환 신부 선종

64년 부임한 임실 굶주림 심각…고생 끝 산양유 공장 세워

불치병 걸린 이후 “장애인 고통·재활 함께” 공동체 만들어

경향신문

지정환 신부가 지난해 주간경향과 인터뷰하며 치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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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전북 임실이라는 지명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은 ‘치즈’일 것이다. 농사도 짓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치즈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고, 임실은 한국 치즈의 대명사가 됐다.

벨기에 출신으로 한국 땅에서 60년을 보낸 ‘한국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가 지난 13일 오전 9시55분 선종했다. 향년 88세.

지 신부는 193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59년 한국에 왔다. 전북 전주와 부안을 거쳐 1964년 임실 성당에 부임했다. 당시 임실은 산골이라 굶주림이 심했다. 몇몇 농가에서 산양을 키우고 있었는데, 산양유가 생겨도 팔 곳이 마땅치 않아 버리기 일쑤였다. 지 신부는 버려지는 산양유를 보고 치즈를 떠올렸다.

유럽에서는 가정에서도 치즈를 만들어 먹으니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지 신부의 부모님이 지원해준 2000달러로 치즈 숙성공장을 만들었으나 3년 동안 시행착오만 겪었다. 지 신부는 유럽으로 가 직접 치즈 기술을 배워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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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환 신부(왼쪽에서 두번째)가 1960년대 조선호텔 요리사들에게 임실치즈를 선보이고 있다. 지정환 신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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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신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치즈공장을 3개월간 다니며 무작정 묻고 또 물었다. 이탈리아의 한 기술자가 ‘먼 나라에서 고생하는 신부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며 비법 노트를 내놓았다.

지 신부가 떠나 있는 동안 대다수의 산양 농가는 산양을 팔아치웠다. 지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을 모았다. 1969년 임실치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 신부는 서울 호텔과 남대문 외국인 전용상점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조선호텔도 임실치즈와 계약했고, 한국에서 최초로 문을 연 서울 명동 피자가게도 임실의 모차렐라 치즈를 주문했다.

좋은 일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쉰도 되지 않은 나이에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왔다. 지 신부는 1981년 그동안 일궜던 치즈산업 기반을 협동조합에 넘기고 벨기에로 떠났다. 1984년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지 신부는 재활공동체 ‘무지개 가족’을 만들었다. 지 신부는 지난해 8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한 무지개 가족은 천주교 전주교구의 지원으로 완주에 자리를 잡았다. 2007년에는 ‘무지개 장학재단’도 만들었다.

2004년 사목일에서 은퇴한 지 신부는 2016년 2월4일 법무부로부터 ‘특별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받았다. 지난해 초에는 창성창본을 신청해서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다.

“누구를 위해서 한 것은 없어요.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전 단지 그들과 함께한 것뿐입니다. 노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들에게 가라.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들을 배우고 사랑하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라.”

빈소는 전주시 덕진구 전주 중앙성당에 마련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16일 오전 10시 전주 중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진행한다. 장지는 전주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지 신부는 한국땅에 묻힌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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