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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교사에게 붙여진 포도알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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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서울 강서구 신곡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발표한 학생을 칭찬하고 있다. 한국일보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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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의 성과상여금, 승진가산점으로 눈살을 찌푸리다 보면 초임 시절 잠깐 썼던 포도알 스티커가 생각난다. 당시 많은 선생님들이 썼고, 유행 따라 나도 아이들 사물함에 개인별로 붙여두고 학급을 운영했다. 초등 5학년 아이들은 스티커를 받기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내 잔소리는 확실히 줄었고 학급 관리는 한결 수월했다.

며칠 지나다 보니 아이들은 내가 알아주어 스티커를 주면 그 일을 하고, 혹시라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면 잘하던 일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착한 일을 했다고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스티커판에 붙은 스티커 수대로 서열이 매겨지면서 스티커가 적은 친구가 짝이 되면 모둠 스티커가 적어지니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겪으며 인센티브와 페널티는 관리와 통제의 수단이지 사람을 성장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다 못한 나는 스티커판을 없애자고 했다. 아이들과 열띤 토론 끝에 지금까지 받은 스티커를 모두 더해서 학급 파티를 하고 스티커판을 없앴다. 결국 야심 차게 시작했던 포도알 스티커는 채 1년도 못 쓰고 우리 반에서 사라졌다. 아이들이 잘못할 때 내 잔소리는 다시 늘었고, 잘할 때는 스티커 대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티커의 빈자리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요즘엔 한때 유행했던 포도알 스티커가 붙어 있는 교실을 보기 쉽지 않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교사가 그 문제에 대해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교사가 아이들에게도 잘 쓰지 않는 것을 정부는 교사들에게 성과상여금, 승진가산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쓰고 있다. 포도알은커녕 깨알보다도 작은 소수점 몇째 자리 점수들을 계속 만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정부가 교사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데 이만큼 손쉬운 제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의도치 않게 받았던 몇 안 되는 깨알들로 내가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깨알들을 받기 위해 교사들끼리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과 암투에 상처받은 기억들이 훨씬 많다.

오늘도 우유통에 아직 가져가지 않은 우유가 몇 개 남았다. 그 아이를 찾아 우유를 건네느라 잔소리가 늘어난다. 당번제를 없앴어도 우유는 또 누가 가져온다. 그 아이를 찾아 칭찬하느라 이래저래 말은 또 많아진다. 이렇게 주고받는 말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걸 느낀다.

수업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글을 쓰는 동안 나도 글을 썼다. 이렇게 쓴 글을 아이들 앞에서 발표했더니 놀랍게 집중해서 내 말을 듣더니 자기들도 포도알 스티커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어디서 받았냐고 물었더니 어린이집, 돌봄교실, 집에서 받아본 적이 있단다.

스티커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기분이 좋다고 대답했다. 질문을 바꾸어 나는 못 받고 친구들이 받았을 때는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다. 기분이 안 좋다는 아이들이 많다. 왜 그런지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보았더니 내가 느끼는 감정과 아주 똑같다. “우리 반도 포도알 스티커를 쓸까?” 하고 내가 물었더니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더니 한 아이가 묻는다. “우리도 기분 안 좋은데 선생님은 왜 포도알 스티커를 해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래저래 부끄러운 교단의 현실이다.

이 부끄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촛불 민심으로 탄생한 정부에 교단 민심을 전한다. 대통령 공약이기도 했던 교원인사제도 개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교사는 결코 승진가산점, 성과상여금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정녕 교사가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행정사무 성과로 보상하지 말고 불필요한 행정사무를 줄여라. 교사가 교육에 충실하며 아이들과 더불어 성장하게 하라. 교사에게 붙여진 포도알 스티커부터 당장 떼라.

정성식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