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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찬국의 세계경제] 리디노미네이션, 허황된 일장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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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이투데이
누가 불씨를 키우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원화의 단위에서 영(0) 몇 개를 지워 새로운 화폐 단위를 변경하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원’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신(新)원‘인지 ‘구(舊)원’인지 혼돈이 생길 가능성 때문에 새 돈의 이름을 정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결정해야 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영을 몇 개나 지울 것인지, 새 돈과 헌 돈을 얼마 동안 통용할지, 동전과 지폐 종류를 몇 개나 만들 것인지, 어떤 모양이 될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특히 새 화폐에 넣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이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상징성을 감안하면 중요하나 좀 지나치다. 십여 년 전 예고편을 보았다. 2007년 한은은 ‘고액권(5만·10만 원) 발행 계획’을 발표하고 진행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정부의 요청에 따라 10만 원권 발행은 중지한다”는 짧은 보도자료를 낸 후 2009년 5월에 5만 원권만 발행했다.

수년간 준비 끝에 최종 단계에서 10만 원권을 발행하지 않고 보류하기로 한 것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일부 언론은 새 돈에 백범 김구의 초상화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 고액권에 들어갈 인물 선정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보수 진영의 백범에 대한 거부감이 진짜 이유라는 것이었다. 5만 원권의 신사임당에 대한 잡음도 꽤 많았다.

고액권 두 종류를 둘러싼 논란이 이러하니 리디노미네이션이 추진되었을 때 예상되는 난리법석은 당시의 논란을 새 발의 피로 만들 것이다. 문제는 한은이 이 사안을 관장하는 기관이지만 논란이 격해지면 이를 조정하거나 통제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전문분야인 통화정책 독립성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현실은 한은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지 않음을 반증한다. 그러니 정치적·사회적으로 찬반이 과열되는 것을 막거나 정리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핵심적 문제이다. 달러로 환전할 때 단위 차이가 너무 커 창피하다는 것이 정치인들이 언급하는 당위성이다.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새 돈 찍기’의 우선순위는 낮아 보인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임기가 남은 방송매체 경영진을 물갈이하는 관행은 어떤가? 후진국에서 정변으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 처음으로 하는 일이 방송국을 점령하는 것인데, 한국에서 이런 후진적 관행이 아직까지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경제정책 파탄으로 물가가 폭등하며 화폐 가치가 급락할 때 안정책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이 시도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초(超)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독일의 예가 유명하다. 십여 년 전 터키, 지난해 베네수엘라가 이런 일을 치렀다. 경제가 안정적인 국가가 돈을 바꾸는 일은 드물다. 굳이 찾자면 1999년 유로화 도입이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당시 유로화 출범국 중 이탈리아의 리라화가 1유로당 1963.27리라로 제일 높았다. 유로화 교환 비율이 2마르크 미만이었던 독일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정치적 불안과 경제의 방만한 운영으로 물가가 크게 오르며 화폐가치가 떨어진 결과였다. 이탈리아가 유로화 도입을 제일 반겼다고 하는데, 원화 환율 수준에 창피해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한국 정치인의 반응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 이탈리아의 불안한 정치·경제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은 유로화 탈퇴를 지지하는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돈을 바꾸어도 더 나은 새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적폐청산의 맥락에서 새 돈 발행을 추진한다면 혼란만 키우는 악수(惡手)가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통화가치를 안정시켜 경제안정의 초석이 되어야 할 중앙은행이 사회적 갈등이 고조된 시점에 만에 하나 시류에 편승하듯 리디노미네이션을 자가발전했다면 무책임한 언행이다. ‘기재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개탄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에 ‘0’이 세 개나 붙는 일에 책임이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위상 강화를 위해 시류 읽기가 아니라 내공을 다지는 정도(正道)를 따라야 할 것이다.

[허찬국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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