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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레이와 시대’ 맞이하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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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일본에서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린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126대 ‘덴노(天皇)’에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상징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의 부친인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과거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일왕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끝나면서 ‘인간 선언’을 통해 일반인들과 똑같은 위치로 환원됐으나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하다. 국정 권한이 없으므로 국가 원수라고 간주하기는 어렵지만 ‘국가통합의 상징’이라는 역할만큼은 충분히 수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 시대를 알리는 연호에 사회적으로 비상한 관심이 쏠리는 데서도 왕실에 대한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레이와’라는 연호가 새봄의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부터 눈길을 끈다. 일본 시가집 만요슈(万葉集)의 ‘매화의 노래’ 서문 중 ‘初春令月 氣淑風和’ 문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새봄이 되니 공기는 맑고 바람은 온화하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매화꽃 향기의 산뜻한 정서가 느껴진다. 지금껏 일본 연호가 모두 중국 고전을 출처로 삼았던 전례에서 처음으로 벗어났다는 자체가 색다르다.

하지만 이 연호가 지닌 의미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잊혔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운 조화’의 의미를 강조하는 공식 설명에도 불구하고 ‘레이(令)’를 ‘지시’, 또는 ‘명령’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내부에서조차 “국민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훈시하는 것이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더구나 ‘와(和)’라는 글자가 태평양전쟁의 장본인인 히로히토(裕仁) 당시의 연호 ‘쇼와(昭和)’에서 따온 것이라는 지적에 이르러선 섬뜩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국수주의, 더 나아가 군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움직임과 관련돼 있음은 물론이다. 아베 총리 스스로도 “우리는 레이와 시대의 출발선에 섰다”며 “일본을 어떠한 나라로 만들어갈지 미래상을 정면으로 논의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는 언급으로 속내를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평화헌법에 대한 개헌 추진이 핵심이다. 새 연호 고안에 참여한 나카니시(中西進)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연호 선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아베 정권의 군국화 경향을 경계했던 바탕에도 이런 연유가 깔려 있다.

최근 한·일관계가 갈수록 악화되는 것도 아베 정권의 완강한 자세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대응도 강경하긴 마찬가지다. ‘빨갱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도 친일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자 배상문제에서부터 초계기 갈등,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문제까지 두루 얽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심지어 며칠 전 확정된 일본 정부 외교청서에는 관행적으로 들어가던 한국과의 ‘미래지향적 관계’ 표현까지 빠졌다고 한다.

이에 비한다면 일본 왕실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아키히토 일왕이 1990년 도쿄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백제 무령왕을 거론하면서 일본 왕실의 혈통이 백제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에 얼마나 진정성이 담겨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지만 적어도 내각의 움직임과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며칠 뒤면 나루히토 왕세자가 즉위해 새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한·일관계가 당분간 호전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왕실만이라도 기존 입장을 지켜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과거사 사죄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