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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백화점 와인숍 직원의 돌출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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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인생의 모든 맛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커피가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는 종이컵에 타먹는 믹스커피 맛밖에 모르지만, 와인이라면 좀 호기심이 있는 편이다.

즐겨가던 와인숍이 있었다.

가끔 그곳에서 와인을 골라 집에 쟁여두었다가 와인 한 잔 당기는 날 개봉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소확행은 아니다. 고른 와인이 심심치 않게 실패하기 때문에 ‘확실한’ 행복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 인생 와인을 다시 찾아 헤매게 되는지도 모른다.

몇 년간 그렇게 하다 보니 단골이 되어(=사실상 판촉 고객 명단에 올라가), 때때로 단체문자가 왔다. 선착순으로 한정판매하는 그랑크뤼 와인이라든지, 만화 <신의 물방울>을 통해 유명세를 탄 와인들을 포함한 와인 리스트와 가격이 그 내용이었다.

병원 스케줄을 비워놓은 어느 평일 오전, 비가 내려 운동 계획도 모두 취소되어 허탈했다. 기분은 별로였지만 시간 여유가 생긴 김에 그 문자 생각이 나서 와인숍을 방문했다. 문자를 보내오는 와인 어드바이저의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문자를 뒤져 이름을 확인하고, 그 직원이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접니다’였다. 필자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 못하는데, 직원은 필자를 알아보고 원장님이라고 불러주어 내심 미안했다.

‘가난한 자의 그랑크뤼 와인’이라는 별칭의 5등급 프랑스 와인을 포함해 대여섯 병 샀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 모임에는 와인 한두 병만 가져가면 되는데, 그 직원을 전혀 기억 못한 미안함에 몇 병 더 샀다. 그런데 와인을 사고 계산을 하는 내내, 그녀의 입이 필자의 마음에 걸렸다. 그 전에도 여러 번 봤던 직원일 텐데 유독 그날은 그랬다. 그녀의 입은 정말 심한 돌출입이었다. 조금만 웃으면 잇몸이 훤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날 그녀는 어두워보였고 지쳐보였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친절하고 성실했음에도 어쩐지 힘겨워보였다. 필자의 기분이 별로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필자도 모르게 돌발질문을 했다.

-실례지만 결혼하셨나요?

-네? 네. 했어요.

그녀는 경계심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결혼했냐고 묻는 것은 자칫, 싱글이면 만나자는 뜻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아 그렇군요. 아, 이런 말 드리긴 조심스럽지만, 사실은… 싱글이시면 제가 입을 예쁘게 만들어드리고 싶었거든요. 하하. 이미 결혼하셨…

필자는 멋쩍게 웃었다.

-아… 아니에요. 저 입이 많이 나왔죠? 사실 입을 너무 넣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인 건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성형외과 선생님이셨어요? 이런 수술도 하세요?

가만히 잘 있는 사람 돌출입 가지고 갑자기 트집 잡은 것 같은 미안한 마음에, 와인 몇 병 산 것을 들고 얼른 자리를 떴다.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억지로 한 리액션일 수도 있다. 갑질하는 고객이 되어 감정노동을 강요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확히 5일 후, 그녀는 필자 병원의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성형외과 전문의가 된 이후 20년 동안 봐온 환자 중에 가장 주저하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수술을 택한 환자가 있다면, 필자 역시 주저하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그녀를 꼽을 것이다.

다시 와인을 샀던 그날로 돌아가보자면, 와인숍을 나와 운전 중인데 그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필자는 계산이 잘못되었거나 착오가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녀의 질문은 가능하면 빨리 수술할 수 없겠느냐는 거였다. 오히려 필자가 ‘더 고민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수술하시게요?’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병원을 찾아와 검사를 마치고 돌출입 수술 날짜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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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결과는 예상대로 드라마틱했다. 사실 돌출입이 심할수록 입술이 후방 이동되는 양 자체가 더 많고, 그만큼 수술 전후의 변화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또한 돌출입이 심할수록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나 컴플렉스도 더 크다. 그러니 돌출입이 사라졌을 때는 마음의 짐도 더 홀가분하게 넉넉히 내려놓는 셈이다.

수술이 끝나고 몇 달 후 그녀가 병원을 찾아왔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며 레어 빈티지 와인을 선물해주었다. 미소가 빛났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수술하고 나서 백화점에서 난리가 났다며, 아는 직원들이 모두 자길 구경하러 와서 신기해하는 바람에 유명인사가 되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녀는 필자에게 돌출입 수술을 받기 한 달 전쯤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다섯 살배기 아들과 친정엄마 곁으로 다시 들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매장에서 일하던 그녀가 지쳐보였던 시기와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이혼이 인생의 나락인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도약이 될 수 있다.

-힘든 시기였는데… 원장님을 만나게 된 게 무엇보다도 잘된 일 같아요. 엄마가 아침마다 절 보시고, 너무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세요.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친절하다. 성실하다. 그리고 이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영국의 캐서린 하킴은 저서 <매력자본>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포함한 매력자본이 남녀관계를 포함한 사적인 관계, 사회적 관계, 직장, 정치, 공공영역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력을 기술했다. 매력자본은 돈과 재능, 인맥 못지않게, 중요한 제4의 자본이며 성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필자가 특정 종교 전도하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스윽 다가가 돌출입을 지적하고 수술을 권하지는 않는다. 그날 그냥 와인만 사면 될 것을, 필자가 왜 그녀에게 그런 말을 꺼냈는지 필자도 알 수가 없다. 그녀 역시 그냥 흘려들어도 될 것을 어떻게 주저없이 필자를 신뢰하고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끝이 좋으니 그게 그녀의 대운이었고, 필자가 그녀에게 나타난 귀인인 것으로 하자.

몇 년이 흘렀다. 지인들과 모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저쪽 테이블을 보니 와인동호회로 보이는 모임이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진주처럼 빛났다. 그녀였다. 필자를 알아보고 주저없이 필자에게 와 반갑게 인사했다. 와인 어드바이저답게 ‘이 와인바에서는 이 아르헨티나 와인을 꼭 드셔보세요’라고 추천해주었다. 와인은 정말 맛있었다. 갑작스런 소확행이었다.

그녀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의 도약대에 서있다.

아직 싱그럽고, 아직 싱글이다.

그녀 삶의 2막도 아름답길 빈다.

한상백 서울제일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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