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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죽는 날만 기다린다”…보고 싶은 자식 향한 ‘외로운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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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1부 돌봄orz ③가족과 떨어진 슬픔

가족이 세상 전부인 노인들, 요양원서 스트레스 극심

치매 앓으면서도 자녀들 오는 환청·환각에 시달려

애지중지 매일밤 펼쳐 보는 가족사진이 ‘보물 1호’

“잡아주지 마” 고독감 떨치려 ‘벽’ 쌓는 노인들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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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65살 이상 노인 인구는 739만명이다. 노인 인구는 2025년 1000만명을 넘고, 2035년에는 1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추정 치매 환자 수는 75만명 정도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정부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해 노인 돌봄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기 어렵고, 자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노인들이 국가의 보조를 받아 요양원에 들어가거나, 집에서 재가요양보호사들에게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는다. 2019년 3월 현재 15만6435명이 요양원을, 41만930명이 방문 요양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요양원은 이름처럼 노인들이 편하게 생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일까? 국가가 자격증을 주는 요양보호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겨레> 기자가 직접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원 현장에 뛰어들었다. 재가요양보호사 14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고 200여명을 설문했다. 요양원 현지조사 결과 800건, 정부가 고발한 장기요양기관 중 확정 판결이 난 30여건의 판결문도 최초로 분석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3부 8회에 걸쳐 ‘대한민국 노인요양 보고서’를 펼친다. 1부는 권지담 기자의 요양원에서의 한달 기록, 그리고 재가요양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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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지 마. 그냥 내비둬.”

점심식사를 막 마친 지난 2월17일 일요일 오후.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집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203호 입소자인 93살 정숙희(가명) 할머니였다. “숙희 할머니, 오늘 ‘전국노래자랑’ 하는 날인데 보던 것만 보시지 말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할머니가 다시 버럭 소리쳤다. “됐다니까, 그냥 둬!”

요양원 거실 텔레비전은 1년 365일 채널 100번에만 맞춰져 있다. 채널 이름은 ‘이벤트티브이(TV)’. 유행 지난 트로트와 자연 다큐멘터리만 반복되는 채널이다. 그래선지 이날도 노인 네댓명이 텔레비전 앞에서 졸다 깨다를 되풀이했다. 전국노래자랑을 보자는 기자 말에 잠시 활기를 찾는 듯 했던 거실은 숙희 할머니의 호통에 썰렁해졌다. “숙희 어르신은 꼭 100번, 이벤트티브이만 보셔. 채널 바꾸면 큰일 나.” 동료 요양보호사가 속삭였다. 숙희 할머니는 갈색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 때문에 요양원 사람들은 숙희 할머니를 ‘엘사(얼음공주)’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웃지 않는다. “좋다”는 표현도 한 적이 없다. 항상 입을 앙다물고 싸늘하게 사람을 대했다. 요양보호사들도 굳이 그런 할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요양원의 일과를 사사건건 감시하고 참견했다. “물통 물이 미지근하잖아” “소파 좀 제대로 닦아” “죽에 건더기가 너무 많잖아” “화장실 바닥 물 좀 닦아” “화장실 수건 축축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짜증도 냈다.

“어쩜 저렇게 매사 부정적이고 예민한지, 아들도 안 찾아오잖아.” 숙희 할머니가 짜증낼 때마다 요양보호사들은 뒷담화로 서운함을 달랬다. 할머니가 언제부터 요양원 생활을 시작했는지, 입소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아들은 왜 찾아오지 않는지, 요양보호사들은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속내를 꺼내 보인 적이 없다.

“저 선생님이 인사를 안 해. 원장한테 이야기 좀 해.” 2월24일 일요일, 숙희 할머니의 기저귀를 교체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가 다른 요양보호사에게 기자를 고자질했다. 방금 전 인사를 한 터였다. “어르신, 제가 아까 인사드렸는데….” 억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됐어, 저리 가!” 숙희 할머니는 꼴보기 싫다는 듯 기자를 밀어내며 짜증을 냈다. ‘쾅!’ 기자 역시 서운한 마음에 화장실 문을 거칠게 닫고 말았다.

그날 퇴근 무렵 숙희 할머니가 손짓하며 기자를 불러세웠다. “내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 때문에 성났어?” 평소와 달리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 할머니가 낯설었다. “그럴 리가요. 아침에 하신 말씀은 다 잊은 걸요.” 마음에 남은 게 없다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내가 인사하는 걸 엄청 중요하게 생각해. 나는 인사만 잘 하면 돼”라고 부드럽게 답했다.

“어르신, 제가 죄송해요. 앞으로 인사 더 잘 할게요.” 그렇게 답하는 순간, 얼음같던 숙희 할머니의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인사라도 안 받으면 정말 비참해서 그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인사만, 인사만 해줘.”

숙희 할머니가 감정을 드러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숙희 할머니가 텔레비전 채널을 독점하고, 요양원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며,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런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 했다. 바깥 세계에서 쉽게 드러내던 욕망과 의지가 완전히 차단된 요양원 공간에서, 권위는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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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지 않는 전화


숙희 할머니는 처음부터 가시돋혀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노년의 거주지 이전은 노인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특히 새로운 거주지가 시설인 경우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동스트레스 증후군’이다.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불안과 혼돈, 우울과 외로움을 겪게 되는 증상이다.

2009년 대한간호학회지에 실린 경희대 이혜경 연구원 등의 ‘노인요양시설 입소노인의 시설적응에 미치는 요인’ 논문을 보면, △누가 입소를 결정했는지 △가족의 지지가 있는지 등에 따라 적응 정도에 차이가 크다. 한국의 65살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2.1%인 15만6435명이 요양원에 입소해 있는 지금, 대부분의 노인들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40.5%)’ ‘친인척 등 타인에 의해(56.8%)’ 입소가 결정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동스트레스 증후군을 줄이는 등 시설 적응을 위해 가족이나 친지들의 보살핌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기자가 요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숙희 할머니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노인들도 입소 초기엔 가족들이 종종 요양원을 찾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발길이 뜸해진다. 2013년 3월 ㅇ요양원에 들어온 숙희 할머니는 27명 노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입소자였다. 기초생활수급자여서 요양비 전액을 국가에서 지원받는 숙희 할머니는 평소 노인들이 자식, 며느리, 손주 등 가족 자랑을 할 때도 무표정이다. 다리가 불편해 장기요양보험 3등급을 받았지만, 인지 능력은 탁월한 할머니였다. 6년간의 고독한 요양원 생활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얼음 성을 쌓고 고립과 배타적 권위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과 혼돈, 우울과 외로움을 견디려는 노인들의 노력은 ㅇ요양원 근무 한달 내내 여러 장면으로 목격됐다. 86살 신옥희(가명)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옥희 할머니는 까만색 폴더식 휴대전화를 매일 머리 맡에 두고 매만졌다. 휴대전화는 할머니가 바깥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단축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옥희 할머니는 줄창 ‘통화’ 버튼만 눌렀다. 그 탓에 매번 할머니의 전화가 호출하는 건 ‘마지막 통화자’인 아들이었다.

“둘째 딸, 숙자(가명)한테 전화 좀 걸어줘.” 한 번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오전 내내 들여다보던 옥희 할머니가 어느날 기자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오전 11시. 직장생활을 하는 둘째 딸이 한창 일할 시간이었다.

“어르신, 급한 일이세요?”

“아이고, 그냥 통화해보려고. 할 말은 많지.”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기 직전, 둘째 딸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못 견디겠어. 그 통장 다 찾았어? 아니 통장 찾았느냐고. 줬어? 도장까지? 그랬어? 내가 찾아놓은 돈도 있을 건데, 10만원. 10만원 찾아서 약값 주고 그날 약 찾으러 갔었잖아. 도장이랑 통장 다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잘했네 잘했어.” 다짜고짜 통장과 돈의 행방을 물으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둘째 딸의 대화는 2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렇게 특별한 용건 없이 전화를 하니, 두 번 중 한 번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자주 전화를 하고 수시로 여닫아서 옥희 할머니의 휴대전화는 자주 방전됐다. 그런데 옥희 할머니는 스스로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며느리가 다녀가는 날이 되어서야 며느리가 가진 충전기로 꺼진 전화기를 다시 켤 수 있었다. 며느리가 다녀가고 4~5일이 지나면 할머니의 전화는 다시 먹통이 됐다. 그러면 할머니의 불안 증세는 극심해졌다. 꺼진 전화를 연신 여닫고, 충전을 해달라고 떼를 쓴다. 기자가 충전을 해주려 했지만, 요양원 사람들이 말렸다. “지담 쌤, 하지마요. 할머니가 너무 자주 전화해서 그래. 가족들이 때가 되면 와서 충전해 주니까 그냥 둬요.”

27명의 요양원 입소자 가운데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이는 옥희 할머니와 84살 최현실(가명) 할머니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전화는 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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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갇힌 노인들


가족을 그리워하는 건 95살 박혜자(가명) 할머니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우야꼬, 손자 언제 오나 언제 오나.” “아들 안 왔지? 우야꼬 우야꼬.” 혜자 할머니의 세상은 요양원 안에서도 오로지 아들과 손자, 손자며느리 뿐이었다. 문제는 혜자 할머니가 더는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혜자 할머니는 치매가 심각했다. 그러면서도 보행기에 의지해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하루 종일 아들과 손자, 손자며느리를 찾아 헤맸다. 할머니는 종종 아들이 찾아온 듯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손자며느리 역할은 기자의 몫이었다. 혜자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뽀뽀를 했다.

혜자 할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침대 절반을 기자에게 내어주었다. 그날도 혜자 할머니는 기자를 손자며느리로 착각했다. “나는 손부인 줄도 모르고 우야꼬. 힘든데 여기 누워도 된다. 괜찮다. 내 안 더럽다. 내 귀찮게 안할게. 여기가 우리집이 아니라서 재워주진 못한다. 우리집 가면 좋아할긴데… 죽을 수도 없고, 집에 갈 수도 없고.” 혜자 할머니는 간절했다. 말썽 부리지 않겠다며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애원했다. 요양원 일이 산더미 같이 밀려있어도 할머니를 두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내어준 절반의 침대에 잠시라도 누워 손자며느리인 척 시늉했다.

요양원 노인들에겐 개인 소유물이랄 게 없다. 물통과 칫솔, 속옷 정도다. 이런 노인들에게도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 가족 사진이다.

어느날 출근해보니, 86살 명희숙(가명) 할머니의 침대 옆 바닥에 앨범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머리맡에 가족 사진 한 장이 전부였지만, 희숙 할머니는 두꺼운 앨범 한권을 통째로 들고 요양원에 들어왔다. 앨범은 늘 침대 옆 사물함 서랍 아랫칸에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수시로 앨범을 넘겨보며 이런저런 말을 했다. 그러던 앨범이 바닥에 펼쳐진 걸 보면, 전날 오후에도 바닥에 앉아 서랍 속 앨범을 꺼내보다 ‘저녁 6시 소등’을 알리는 요양보호사의 목소리에 앨범을 바닥에 둔 채 잠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펼쳐진 앨범 양쪽에는 8개의 사진이 채워져 있었다. 5살 남짓한 딸과 젊은 희숙 할머니. 희숙 할머니와 팔짱을 끼고 수줍은 표정을 짓는 아들은 할머니를 보러 오는 막내아들과 닮았다. 여행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사진은 자주 꺼내본 탓인지 비닐 안에 거꾸로 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가족을 만났을까. 곤히 잠든 할머니는 자면서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93살 황옥실(가명) 할머니 역시 가족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랜다. 딸이 한 명 있었지만, 딸은 ‘남의 집’ 어른들을 모시느라 자주 찾아오지 못했다. 할머니는 발길 뜸한 딸도, 보내주지 않는 사위도 탓하지 않았다. “우리 손자며느리가 내가 여기 와 있으니까 얼굴 못 보니까 사진이라도 해드려야겠다고 해준 거예요. 바쁜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 찍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 얼마나 예뻐.” 옥실 할머니는 손자며느리 칭찬을 하면서 딸과 사위, 손자며느리가 함께 찍은 사진을 닦고 또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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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만 기다리는 노인들


“오늘이 며칠이여?” “1월 30일 수요일이요.” “설까진 며칠 남은 거지?” “내일이 31일, 그 다음 날이 2월1일이고요. 주말 지나고 화요일, 여기 빨간 날이 설이예요.”

87살 박옥순(가명) 할머니의 물음에 휴대전화 달력을 꺼내 손가락으로 하나씩 날짜를 짚으며 설명했다. 민족대명절인 ‘설’. 외로움이 켜켜이 쌓인 요양원 노인들이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이다. 자식은 물론 며느리, 손자·손녀들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몇몇 노인은 설 연휴를 맞아 자식들의 집으로 외출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목욕이 월요일이여. 그날 목욕하고 (아들 집에) 가면 되겠구먼.” 옥순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인들은 설 전주부터 목욕 날짜를 거듭 확인했다. 평소엔 냄새가 나도 자포자기했지만, 이때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옥순 할머니의 초점 없이 흐렸던 눈동자는 반짝였고,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들 다섯을 둔 옥순 할머니는 설 당일 아들 집으로 가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다. 입소 전 다섯 며느리가 2~3년씩 돌아가며 옥순 할머니를 모셨듯, 명절에 할머니가 머물 집도 순번제로 정해진다고 했다.

“구정 때 가면 그날 저녁 자고, 다음날 아침에 여기 올거야. 하루만 (자야지). 지들 처갓집 장가가고 다 했는디 내가 가서 오래 있으면 뭐해. (며느리도) 자기 집에 가야지.” 옥순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입소한 노인이었다. 친구 아들의 손을 잡고 요양원 계약을 하고 온 날, 아들들은 ‘불효자로 만들지 말라’며 길길이 뛰었다고 했다. 가족 관계가 그렇게 양호한 옥순 할머니의 외출도 설 당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1박2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옥순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짐이 될까 마음 졸였다.

옥순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88살 김순자(가명) 할머니도 모처럼 아들 집에 갈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자식들이 데리러 와. 명절인데 그래도 내가 어머니인데 안 오겠어? 대명절인데. 딸이랑 사위랑 다 나 보러 오지.” 순자 할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다가 이내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자식들이 여기 더 있으라고 할 거야. 여기 있는 거를 좋아하잖아.”

“오늘은 특별히 보호자들이 많이 오는 날이예요. 방 온도 조절 잘 해주고 기저귀 케어할 때는 환풍기 켜놓으세요. 벽에 뿌리는 향수도 방마다 뿌리고, 홀아비 냄새가 나잖아. 참, 어르신 마시는 물통도 바로바로 갈아주세요. 그리고 명찰도 잘 차고요.”

설 전날인 2월4일 아침회의는 요양원장의 지시로 시작됐다. 가족들이 많이 찾아오는데다, 사회복지사와 간호사가 모두 휴무라 원장을 포함한 요양보호사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가족들이 방문하면 요양보호사들의 일은 2~3배로 늘어난다. 가족들이 찾아올 때마다 굳게 잠긴 철문을 열어야 하고, 부족한 보호자 의자를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며 공수해야 한다. 노인들에게 줄 과일을 씻거나 깎는 일도 요양보호사 몫이었다. 어린 손자·손녀가 오기라도 하면 장난감도 꺼내줘야 했다. 가족이 떠난 뒤 남아있는 두유나 우유곽은 바로바로 씻어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떠나는 가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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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설 연휴, 희비 엇갈리는 노인들


“엄마, 모자가 어디있지? 얼굴에 바르는 거 좀 바르고 갈래? 빨간색 우리 엄마 신발 예쁘네. 엄마 이제 좋은데 가자. 명 여사님 갑시다~.”

설 하루 전인 2월4일. 희숙 할머니의 아들은 빨간 신발을 사들고 왔다. “멋쟁이 신발”이라는 요양보호사들의 말에 할머니의 표정이 한껏 달아올랐다. 왁자지껄 떠들던 희숙 할머니와 아들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 빨간 신발을 신고 떠났다.

“저 할머니, 아들 집에 가면 3일은 있다가 와.” 맞은편 방 옥실 할머니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떠날 사람이 모두 떠나가자, 요양원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명절이 되면 요양원 노인들의 행복함과 외로움은 극심하게 양극화한다. 80살 허선혜(가명) 할머니가 그랬다. 선혜 할머니는 같은 반인 84살 최남준(가명) 할머니 가족을 피해 거실로 나와 앉았다. 아들과 딸, 며느리와 손자, 손녀까지 10명이 넘는 대가족이 찾아온 남준 할머니 가족은 침대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옆 방 보호자 의자까지 빌려왔다. 평소에는 온종일 꼼짝 않고 누워있는 남준 할머니는,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머리가 흔들린다. 여기 저기가 다 아프다.” 아이처럼 가족들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선혜 할머니가 피해 나온 거실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누가 날 좀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안 데리러오네. 외국에서 공부시켜 봤자 소용없어.”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선혜 할머니는 ‘혹시 아들이 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자 속상한 마음을 털어놨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기대를 접지 못했다. ‘띠리링~’ 현관에서 벨이 울릴 때면, 선혜 할머니는 혹시나 싶어 현관 쪽으로 고개를 빼꼼이 내밀었다.

자녀들의 성별도 요양원 노인들의 설 풍경을 갈라놓았다. 아들을 둔 노인들은 가족이 방문하거나 외출을 다녀왔지만, 딸을 둔 노인들은 방문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설에 가족이 오냐’는 기자의 질문에 옥실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난 아들도 없고 딸 하나 밖에 없는데, 딸이 어떻게 와? 못 와. 오늘은 음식 만들어야지, 내일 아침에는 제사 지내고 어쩌고 어떻게 와”라고 했다. 옥실 할머니는 딸을 대신해서 하는 변명이 민망했는지 화로 그 민망함을 숨기려 했다. 그 사이 다른 할머니의 두 아들은 ‘아내와 함께’ 요양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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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수록 강해지는 노인들


“나 잡아주지마, 계속 잡아줄 거 아니면.” 화장실로 가기 위해 일어서던 옥실 할머니가 정색하며 기자의 손을 뿌리쳤다. 옥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회장님으로 불렸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노인들과 요양보호사들을 살뜰히 챙겨 붙은 별명이다. “몸땡이가 건강해야 잘 먹고 잘 잔다. 새해에는 건강하고.” 다른 사람을 누구보다 잘 챙긴 옥실 할머니였지만, 정작 자신은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죽을 때까지 기약 없이 이곳에 머무르는 노인들과 달리 요양보호사들은 1~2년을 넘기지 못하고 교체된다. 할머니들이 요양보호사에게 마음을 줘봤자 결국 다시 혼자 남는다는 걸 잘 안다. 오랜 요양원 생활은 사람들에게 주는 정이 결국 자신을 더 외롭게 한다는 경험칙을 체득하게 했다. 휠체어를 타는 숙희 할머니 역시 일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잡아주지 마.” 화장실 문턱 앞에서 끙끙대는 숙희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어주다 되레 혼쭐이 났다. 숙희 할머니는 목욕을 제외한 모든 일을 혼자 척척 해냈다.

옥실 할머니는 저녁마다 “내일 아침엔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건강하라’는 덕담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였지만, 자신의 소원은 이른 죽음이다. “믿을 데가 없잖아. 자식이 없으니까.” 요양원 노인들은 고독할수록 강인해진다. 이곳 요양원에서 의지할 곳은 자신 뿐이다. 옥실 할머니는 오늘도 한발 한발 난간에 의지해 꿋꿋이 혼자 화장실로 향했다.

글·사진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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