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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통화의 시대’ 가고 ‘재정의 시대’ 오나…‘MMT 논쟁’이 남긴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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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

저금리·저물가에 통화정책 여력 줄어

‘재정 건전성’ 신화 허무는 MMT 눈길

기축통화국 아니면 경제 불안정 우려

‘어디에, 어떻게’ 등 정책 틀 손봐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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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MT : 현대통화이론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례 국정연설.

82분간 진행된 연설에서 ‘빚’, ‘적자’란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채 발행 한도를 늘리려 하자 ‘재정적자 망국론’을 펴며 발목을 잡던 공화당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실상은 정반대다. 2017년 초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감세와 적자 재정을 이어간 탓에 나라 곳간은 빠르게 비어가는 중이다. 지난해 재정적자 규모는 7790억달러(약 857조원). 2000년 2360억달러(약 267조원) 흑자와 견주면 엄청난 변화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현재 78%인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28년께 100%를 넘어서리라 전망한다. 문제는 우려와는 달리, 눈덩이처럼 빚이 불어나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

■ 흔들리는 ‘재정 건전성’ 신화 외려 미국 경제는 보란 듯이 순항 중이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은 3.2%(연율 기준). 전문가 예상치(2.5%)를 훌쩍 넘어섰다. 4월 실업률은 3.6%로 196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비밀은 정부의 과감한 적자 지출에 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 6일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정부가 돈을 풀자고 나섰을 때 재정 위기가 온다며 반대했던 주장들이 다 틀린 것으로 판명 났다”면서,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트럼프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이름을 따 ‘도널드 케인스의 경제학’이란 딱지를 붙였다.

정부 빚이 늘어나는데도 금리와 물가는 낮은 수준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난해 10년물 국채 평균 실질금리는 0.8%. 재정 흑자가 정점에 이르렀던 2000년 4.3%와는 크게 대비된다.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근원 개인소비지출(core PCE) 평균 상승률은 1.59%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인플레이션 목표치(2%)를 크게 밑돈다.

이런 현실은 기존 경제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수수께끼다. 주류 경제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세입 규모 이상으로 지출하려고 빚을 내면(국채 발행) 시중에 채권 물량이 늘어 금리가 오르고(채권 가격 하락) 결국 민간부문의 투자와 소비가 줄어드는 부정적 효과(구축 효과)를 낸다. 이자를 갚기 위해 통화 발행을 늘릴 경우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는 건 물론이다. 재정 건전성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뿌리 깊은 근거다.

저금리와 저물가 기조가 굳어지면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를 바라보는 시각도 차츰 변하는 중이다. 과거 엄격한 재정 준칙을 강조했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명예교수(전 재무부 장관)조차 <포린 어페어스> 3·4월호에 실린 ‘누가 재정적자를 두려워하는가’란 글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정부가 부채의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재정 균형론은 틀렸다’…MMT의 도전 이참에 현행 통화정책 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부쩍 높아졌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중에 돈이 흐르는 원리의 뼈대는 통화 당국의 금리 조정(통화정책)이다. 금리가 위아래로 자유로이 움직이면서 민간 수요와 경기 사이클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절의 유산이다. 준비에서 집행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재정의 역할(재정정책)은 축소돼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금리가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상황에선 경제가 더 어려워지더라도 통화 당국의 추가적인 금리 인하 여력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기 대응 수단이 사실상 무력해진 셈이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지난 금융위기 때처럼 통화 당국이 급히 금리를 내리거나 아예 양적완화(QE) 같은 파격적 방식을 쓰더라도, 정작 자산시장 가격만 끌어올리기에 십상이라는 점이다. 경기를 살린다며 시중에 푼 돈이 실물 부문 구석구석으로 고루 흘러들기는커녕 소수 자산계층의 부만 늘려주는 꼴이다.

‘현대통화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이라 이름 붙은 새로운 조류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통화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진 빚이 늘어나더라도 그 자체로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국가는 경제주체 가운데 유일하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자국 통화로 표시된 채무에 대해 파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걱정도 필요 없다. 생산 능력 이상으로 시중에 돈이 풀려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질 경우엔 정부가 세금을 거둬 돈의 양을 줄여주면 된다. 더욱이 정부가 빚을 지면(재정적자) 민간부문의 금융자산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가계가 더는 빚질 능력이 부족할 땐 정부라도 나서 과감하게 빚을 지고 지출을 늘리는 게 외려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세입 규모의 틀 안에 재정 지출 규모를 가두려는 ‘재정 균형론’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사실상 ‘통합’한 현대통화이론은 두 갈래로 이어져온 화폐이론 전통의 한 축을 토대로 삼고 있다. 한쪽은 화폐란 개인과 시장이 교환수단으로 쓰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받아들인 물건(상품)이라는 주장을 폈지만, 다른 쪽에선 화폐는 법(국가)의 산물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대통화이론이 정부는 절대 파산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건, 똑같이 빚을 지더라도 정부(화폐 발행자)와 민간(화폐 사용자)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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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도 같다? 한국은 다르다? 나라 안팎에선 우리나라도 재정의 빗장을 활짝 여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은행은 지난 1월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1.4%로 내려 잡은 데 이어 석 달 만인 4월엔 다시 1.1%로 하향 조정했다. 현행 물가안정 목표치(2%)와는 커다란 괴리를 보인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38.2%다. 게다가 아직은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성장률)가 빚이 느는 속도(국채 금리)보다 빠른 까닭에 정부가 추가로 빚을 낼 여력은 꽤 큰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6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지금 재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현대통화이론이 내건 처방을 무작정 적용하기엔 한계도 적지 않다. 만성적인 재정적자는 자동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낳고, 경상수지 적자는 급속한 순자본유입으로 이어진다.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전제로 했을 때 과도한 재정적자는 인플레이션 여부와는 무관하게 경제 안정성을 크게 해칠 우려가 크다. 설령 경상수지 적자가 불어나더라도 달러를 무한정 발행해 적자를 메꿀 수 있는 미국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대외 부문 불안(환율 변동)이 대내 부문(물가)으로 빠르게 파급될 가능성도 무시하긴 힘들다. 한마디로 국제 금융 질서의 ‘기축통화국’인 미국과 자본이동의 변동성 위험에 항상 노출된 한국의 처지는 딴판인 셈이다. 현대통화이론이 설령 미국엔 ‘요술봉’이라 쳐도 다른 나라들엔 외려 독이 되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의 결정판이 될지도 모르는 이유다.

■ 화폐는 ‘공공재’…MMT 논쟁을 넘어 현재 미국에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물가안정 목표’ 변경 논의가 한창이다. 목표치를 △현행 2%에서 3% 또는 4%로 높이거나 △목표 범위 설정(1.5%~3%) 또는 △인플레이션 대신 명목 지디피나 성장률을 목표로 삼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중요한 건 결국 ‘어디에, 어떻게’다. 경제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풀린 돈이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우는 게 아니라 교육과 인프라, 의료·보건, 연구·개발 등 미래를 위한 투자 영역으로 흘러들도록 하는 처방, ‘중앙은행→시중은행’의 신용 창출 시스템을 넘어서는 전달경로는 풀어야 할 숙제다. 속성상 경기에 좌우되는 재정의 변동성을 최대한 줄일 방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예컨대 불황기엔 재정에 통화 증발을 결합하는 ‘혼합형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조합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참고할 만하다.

무게의 추가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이런 변화에서 짚어봐야 할 대목은 있다. 지난 4월 초 발행된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표지 제목은 ‘간섭의 날’(interference day)이다.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을 빗댄 이 표현은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포퓰리즘 바람 속에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흔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선출된 정치권력의 손에 ‘돈줄’의 열쇠를 얼마만큼 넘길 것인가의 문제는 성급히 답하기 어려운 ‘중대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건 현대통화이론의 공이다. 화폐란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사회제도이며, 핵심 공공재이다. 발권력, 중앙은행 제도, 재정 준칙 등을 따지는 준거도 여기에 있다. 비록 현대통화이론이 한계가 적잖은 처방이긴 하나, 저금리·저물가가 사실상 ‘뉴노멀’이 된 시대에 재정 건전성 신화에서 깨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물꼬를 틔워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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