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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수백억 재원 방안도 없이…‘지자체 농민수당’ 포퓰리즘 논란 [이슈&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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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들 치적용 ‘밀어붙이기’ / 선거공약 내세운 지자체 중심 본격화 / 전국 지자체 절반 100여곳 관심 보여 / 지역별 지급대상·액수·방법 등 제각각 / 해남, 90억 지급 예상… 예산 1.1% 달해 / 표 얻기 위한 ‘생색내기용’ 지적 나와 / 지역의원 “정부 기준 만든 뒤 지원해야”

전남 해남군이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농가소득 보전용 농민수당(전, 후반기 30만원씩 연간 60만원)을 내달 지급한다. 전남 화순·함평·광양·강진과 경기, 충남 등의 지자체에서도 농민수당이 도입을 앞두거나 추진되고 있어 전국으로 확산할 조짐이다. 화순·함평이 계획 중인 가구당 농민수당 지급액은 연간 120만원으로 해남의 2배다. 하지만 지자체마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농민수당을 무리하게 밀어붙여 단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일 농림축산식품부와 보건복지부, 지자체 등에 따르면 농민수당 도입을 추진·검토하는 지자체는 30여곳에 이른다. 농민수당에 관심을 보이는 지자체는 전국 지자체의 절반에 가까운 100여곳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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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수당 도입의 첫 관문은 보건복지부와의 협의다. 지자체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변경할 때는 복지부 협의를 거치도록 한 규정 때문이다. 복지부는 농민수당을 사회보장제도 성격이 짙다는 판단에 따라 협의 대상에 포함했다.

올해 들어 해남군 등 전남지역 일부 지자체는 복지부에 농민수당 도입에 대한 협의를 요청했고, 복지부는 지난 3일 ‘농민수당 추진이 가능하다’는 협의 결과를 내놓았다. 협의를 마친 해남군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농민수당 지급 절차를 밟고 있다. 해남 농민들은 지난 10일까지 농민수당 신청서를 읍·면사무소에 제출했고 마을 이장과 읍·면사무소는 신청자를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적격 여부를 심사한다.

이런 절차를 마치면 해남 농민들은 다음 달 전국 지자체 중 처음으로 30만원의 농민수당을 받게 된다.

하반기에도 30만원의 농민수당이 지급된다. 해남군은 연간 60만원의 농민수당을 지역상품권(해남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할 방침이다. 지급 대상은 신청연도 직전 1년 이상 해남에 주소를 두고 실제 거주하는 농민이다. 농민수당 수혜자는 1만5212명으로 해남군 전체 인구(7만1214명)의 21%나 된다. 해남군 올해 예산은 8351억원인데, 농민수당 예산은 90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1.1%다. 해남군은 민선 7기 지방정부를 시작한 지난해 7월 지자체장 핵심공약인 농민수당 도입 방안을 추진했다. 공청회와 조례 제정, 복지부 협의를 거쳐 농민수당이 실제로 지급되기까지 10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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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남 해남군이 문화예술회관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마련한 농민수당 지원제도 주민설명회에 농민들이 대거 참석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해남군 제공


◆지자체마다 제각각… 형평성·포퓰리즘 논란

‘해남발 농민수당‘이 전국 지자체로 퍼질 조짐이다. 농민수당은 농업인의 소득 안정과 농업가치 보상이라는 점에서 농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지자체만의 독자적 시행으로 지자체 간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는 데다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들이 재원확보 방안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농민수당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성이다. 지자체마다 농민수당 도입 여부가 다르고 시행 시기와 지급 대상, 액수도 제각각이다. 지난 지방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운 지자체를 중심으로 농민수당 도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0여개 지자체가 올해 안에 농민수당을 지급하거나 지급 여부를 결정할 전망이다. 농민수당 도입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지자체 농민들을 중심으로 같은 농민인데도 지역 차별을 받는다며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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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행덕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가운데), 민중당 이상규 상임대표(오른쪽 두 번째) 등 전농, 민중당 관계자들이 지난 8일 국회 정론관에서 농민수당 도입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농민수당 도입을 추진하는 지자체 역시 지급 대상과 액수, 방법 등이 달라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전남 화순군과 함평군이 계획 중인 가구당 지급액은 연간 120만원으로 광양시와 해남군의 60만원보다 2배 많다. 지급 대상도 천차만별인데 대부분의 지자체는 농업인으로 제한해 축산인과 임업인, 어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농업 경영체를 등록한 농가로 지급 대상을 한정한 경우도 많아 여성 농업인들이 제외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남도는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군의 재정 일부를 부담해 농민수당 지급 액수를 동일하게 맞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남도 관계자는 “도내 지자체의 농업 여건은 비슷한데도 시·군별로 지급 기준이 다르면 상대적 박탈감이 생긴다”며 “이럴 경우 농민수당의 본래 취지가 퇴색해 지급 방법과 시기 등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원 확보도 만만찮은 문제다. 경북 상주시의 경우 농민수당을 놓고 시와 농업인 단체가 협의를 벌였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농업인 단체들이 연간 120만원을 제안했다가 다시 두 배인 240만원으로 올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전남도의회 우승희 의원은 “농민수당을 1인당 10만원씩만 준다 해도 연간 1800억원이 필요하다”며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지 솔직히 답답하다”고 말했다.

농민수당은 포퓰리즘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자체장 공약으로 시작된 농민수당이 표를 얻기 위한 생색내기 아니냐는 눈총도 받고 있다. 전남지역 한 농민은 “사실 연간 60만원이 농가 안정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한 뒤 “그런데도 단체장이 차기 선거를 노리고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수당을 지자체가 아닌 국비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전남지역 한 군의원은 “농민수당이 농업 보전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결국 예산 확보가 관건”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통일된 기준을 만들고 예산도 지원하는 것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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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지자체로 확산… 복지부 협의 완료

농민수당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지역은 전남이다. 해남과 화순, 함평, 광양, 강진 5곳은 이미 복지부와 협의를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경기와 충남, 전북 지역에서도 농민수당이 추진되고 있다. 경기 여주시는 올 하반기 시행을 목표로 농민수당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 이천시의회는 농민수당 조례를 입법 예고했지만 상임위에서 보류됐다. 충남에서는 부여군이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농민수당을 추진하는 지자체 대부분은 지급 대상으로 농촌에 실제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농민으로 제한하고 있다. 농업외소득이 3000만원 이상이면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도 두고 있다. 농민수당은 대부분 현금과 지역화폐를 절반씩 섞어서 연 1∼2회 지급하는 방안이 주로 검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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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지자체에서도 농민수당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광역지자체가 도입하면 기초자치단체 농민들은 자연스레 대상자에 포함돼 농민수당이 빠르게 확산될 전망이다.

전남도는 7월쯤 용역 결과가 나오는 대로 농민단체들과 협의를 거쳐 내년에 전남형 농어민 공익수당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전북도는 내년도 농민 공익수당 도입을 위한 설명회를 개최하고 하반기 조례 제정과 예산 확보에 나설 예정이다. 지급 대상은 1000㎡ 이상의 농지를 보유하고 실제 경작을 하는 농민이다. 충남도의회는 지난달 농민수당과 관련한 연구모임을 출범했다.

명칭은 다르지만 농민수당과 유사한 정책들도 지자체에서 시행되거나 검토되고 있다. 강원도는 소농직불금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이다. 전남 강진군은 2017년부터 쌀 농가에 연간 70만원의 경영안정자금을 지급하고 있다. 전남 진도군도 어르신 소농직불금을 3년째 시행하고 있다.

지난달 복지부와 협의 결과를 계기로 그동안 눈치를 보던 상당수 지자체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농민수당 도입은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해남군 관계자는 “전국 지자체 100여곳에서 우리 군에 농민수당의 조례 제정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문의를 해왔다”고 말했다.

◆“소득보전 정책” vs “농업보상 정책”

“소득보전 정책으로 사회보장제이다” vs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 성격의 농업 정책이다”

최근 농민수당 도입을 놓고 정부와 농민단체 간 서로 다른 입장을 내놓아 논란이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일부 지자체의 농민수당 도입 추진에 대해 사회보장제 성격이 짙다고 판단한다. 사회보장제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해 국가나 지자체가 보조하는 제도다.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기초연금이 대표적이다. 농민수당의 경우 사회적 위험에 처한 농민에게 수당이라는 소득보전으로 생활을 더 낫게 해준다는 게 복지부의 시각이다.

현행 사회보장기본법은 지자체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하거나 변경할 경우 신설 또는 변경의 타당성, 사회보장 전달체계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복지부와 협의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농민수당은 협의 대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같은 사회보장법을 적용해 최근 일부 지자체의 협의 신청을 받아 복지부와 협의를 거쳤다. 지난 3일 ‘농민수당 추진이 가능하다’는 협의 결과가 나왔다.

복지부 관계자는 “농민수당은 소득보전 정책으로 사회보장제가 맞다”며 “농업 인구의 감소와 소득 불안전 해소 등을 감안해 농민수당 추진이 가능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향후 농민수당을 도입하려면 지자체는 반드시 복지부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

농민단체의 입장은 복지부와 다르다. 농민수당은 새로운 농업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농민수당은 소득보전 정책이 아닌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복지부의 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농민수당은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행위에 대한 보상인데도 여전히 소득을 보태주는 것으로 바라보는 복지부의 시각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농민단체는 농민수당 전남추진위를 구성해 농민수당 전국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추진위에는 전국농민연맹 광주·전남연맹 등이 참여하고 있다. 추진위 관계자는 “농민의 공익 기능을 증진하는 정책은 국제적인 흐름”이라면서 “농민과 농업을 살리기 위해 농민수당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화순·무안·광주=한현묵·한승하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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