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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회사 건강검진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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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감염 사실 누설 금지고, 감염 이유 해고도 금지지만 법과는 먼 현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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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HIV 감염인이라서 해고된 분이 있나요.”

“대형 병원에 다니다가 자체 건강검진에서 HIV 양성으로 나와 해고된 분이 있어요.”

“아니, 해고하는 건 불법이잖아요.”

“불법이죠.”

“검진 결과를 본인 허락도 없이 회사가 보는 것도 불법 아닌가요.”

“불법이죠. 그런데 대응하기가 어려워요. 이걸로 싸우면 동종 업계에 소문나기 쉬우니까요. 다른 직장에 들어가기 어려워질 수도 있고요. 저희도 국가인권위원회 제소나 인권변호사를 통한 법적 대응을 도와드릴 수 있다고 했는데… 감염인이 접으시더라고요.”

“이런 경우가 많이 있나요.”

“해고까지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일을 안 주든지 해서 스스로 그만두게 하죠. 회사에서 건강검진할 때 감염인이 먼저 겁먹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아요.”

기자가 HIV/에이즈 감염인 단체 ‘러브포원’의 박광서 대표와 6월4일 나눈 대화다. 대구교도소에서 원치 않게 감염 사실이 공개된 HIV 감염인들이 출소 뒤 지역사회에서 어떤 피해를 겪는지 알아보다 박 대표에게 연락이 닿았다. 박 대표는 HIV 감염인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다시 취업을 못해 생활고에 빠지는 사례를 이야기했다.

‘아우팅’당한 뒤 건강검진서 요구받아



직장에 다니는 HIV 감염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건강검진’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3조에 따라 사업자는 노동자에게 의무적으로 건강검진을 제공해야 한다(사무직은 2년에 1회, 비사무직은 1년에 1회). 법적 의무인 일반건강검진의 경우 HIV가 포함돼 있지 않다. 차명희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소장은 “중소기업은 굳이 비용을 더 들여서 HIV 검사를 추가시키려 하지 않지만, 대기업은 직원 복지 차원에서 HIV 검사를 추가시키곤 한다”고 했다.

사실 건강검진에서 HIV 양성이 나오더라도 회사로만 결과가 통보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7조에 따르면 감염인을 진단한 사람 등은 감염인 동의 없이 업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박광서 대표가 얘기한 것 같은 예외적 사례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채용시 회사에서 의료기관을 지정해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하라고 할 때도 빚어질 수 있는 일이다. 감염 사실이 직장에 알려진다는 공포는 엄청나다.

차명희 소장도 “감염인들에게서 직장 건강검진을 걱정하는 상담이 많이 온다”고 했다. 차 소장은 그럴 때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뭘 검사하는지 회사나 검진센터에 물어보라고 일러준다. HIV가 포함됐으면 ‘나는 주로 다니는 병원이 있으니 거기서 받아 내겠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다고 안내한다. HIV 검사가 포함되지 않은 일반건강검진의 경우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므로 회사 지정병원 아닌 다른 병원에서 검진을 받더라도 추가 부담금이 없다.

HIV 감염인 보리(가명)씨는 얼마 전 직장을 잃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직장에서 ‘아우팅’당했다. 애인과 나눈 대화창을 우연히 다른 직원이 보고 관리자에게 말한 것이다. 관리자는 보리씨를 불러 HIV가 포함된 건강검진서를 떼오라고 지시했다. 보리씨는 그날부로 퇴사를 결정했다. 그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HIV는 내가 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손님이나 다른 직원에게 피해를 줄 일도 없다”면서 “당황스럽고 불쾌하고 소문이 날까봐 그만뒀다”고 했다.

한번 실직하면 돌아가기 어려워



이는 일부 사례가 아니다.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 공동기획단이 2017년 7월 발표한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를 보면 HIV 감염인의 일자리와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조사는 2016년 한 해 동안 HIV 감염인 조사원 15명이 104명의 감염인을 만나 설문조사한 결과물이다. 감염인 15명에게 한 생애사 인터뷰도 담겼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HIV 감염 후 실직과 단기 불안정 노동을 하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되는 과정은 생애사 인터뷰에 응한 여러 감염인의 경험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즉, 감염 사실이 직장에 알려질 수 있다는 직간접적 우려 속에서 많은 감염인이 노동시장에서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감염인들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깊은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게 된다. 지속적 항바이러스 치료는 감염인들이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지만, 한번 실직을 겪으면 기존의 직업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결국 이 지점에서 감염인들은 이중 낙인을 겪게 되는데, HIV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는 것’보다도 ‘젊은 애가 왜 멀쩡한데 놀고 있냐’는 수급자에게 찍힌 낙인에 다시 한번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설문 결과로도 나타난다.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에 응답한 감염인 104명 중 절반에 가까운 51명이 실업자 또는 비정기적 일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소득도 상당수가 절대적 빈곤선 아래에 있었다. 2016년 기준 1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97만4898원인데, 가구소득 월 100만원 이하인 HIV 감염인이 104명 중 44명이었다.

1998년 WHO와 ILO, 스크리닝 × 요구 ×



직장에서 HIV 감염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세계적 기준이다. 1998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공동회의를 열어 ‘에이즈와 직장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소책자를 만들었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①HIV에 감염됐으나 건강한 노동자는 다른 동료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②에이즈가 발병한 노동자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HIV 감염인은 다른 질병에 걸린 노동자와 동일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9가지 지침이 있는데, 그중에는 집단 검사 금지 조항도 있다. “HIV 감염 자체는 노동자의 직무 수행상의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 감염인이 직장 동료에게 감염시키는 일은 없으므로 채용시 또는 채용 전에 HIV 항체검사나 스크리닝을 실시할 필요는 없으며, 이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사용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된 조항도 있다. “피고용자가 스스로 HIV 감염이나 에이즈 발병을 고용자에게 알릴 의무는 없다. 감염인은 통상 직장 동료에게 감염 위험성을 제공하는 일은 없다.”

한국은 아직 WHO와 ILO의 지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3조 5항에 “사용자는 근로자가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근로관계에 있어서 법률에서 정한 사항 외의 불이익을 주거나 차별대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이 선언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를 어겨도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법을 만들 때부터 나왔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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