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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소수자 속의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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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퀴어축제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부스 찾아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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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대상 그리고 혐오를 위한 수단.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인은 이중 혐오를 겪는다. HIV에 감염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일부 기독교 세력에 의해 성소수자 전체를 비하하고 저주할 목적으로 더 많이 대상화되곤 한다. HIV에 감염돼도 치료만 잘 받으면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혐오 세력은 HIV 감염인을 통틀어 ‘에이즈’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에 걸린다’고 선동한다.

낙인찍기가 감염 예방 방해해



보건학자들은 동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 아니며, 남성 동성애자들의 높은 HIV 감염률은 사회 전반적인 예방 정책으로 풀어야지 성정체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수없이 강조해왔다. 동성애자와 HIV 감염인에 사회적 낙인찍기가 오히려 감염 예방을 방해한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혐오 표현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HIV 감염인들은 소수자 속에서도 소수자가 된다.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이하 ‘알’)의 운영지기인 소주(별칭)씨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도 ‘HIV는 우리와 상관없다’며 격리해서 사고하려는 성소수자가 많고, 그러다보니 성소수자이면서 감염인인 사람은 다중적인 낙인과 차별에 시달린다”고 했다.

6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제20회 서울퀴어축제가 열렸다. HIV 감염인들도 이날 축제장을 찾았다. ‘알’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 HIV/에이즈 인권팀과 함께 퀴어축제장에 부스를 차렸다.

퀴어축제는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힘든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개적으로 공격받는 날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성소수자인 HIV 감염인은 모두 적나라한 혐오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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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입구인 시청역 5번 출구는 ‘온세상경배찬양단’이 차지했다. 한복 또는 군복을 입은 기독교인 100여 명은 북을 치며 흡사 군가와 같은 찬송가를 불렀다. 바로 옆 차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에선 “동성애·동성혼으로 인한 에이즈 발생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에이즈 환자 치료를 위한 국민 세금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직선거리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부스를 차린 ‘알’ 회원들은 온종일 그 방송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퀴어축제장 들머리에선 한 노인이 “동성애는 식성만 찾는 성중독이다! AIDS 전염!”이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다른 노인은 입구에서 기자가 맨 ‘한겨레’ 표찰을 보고 불쑥 다가와 “동성애는 에이즈예요! 보도해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계속 따라붙어서 결국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이 노인은 퀴어축제 참가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다 충돌을 불렀다. 퀴어축제 참가자들이 서울시청부터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한 바퀴 도는 퀴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대한애국당 당원으로 보이는 중장년층 5~6명은 참가자들을 향해 “에이즈! 에이즈! 에이즈!” 구호를 외쳤다. 더도 덜도 없이, HIV 감염인은 성소수자 혐오의 중심에 있다.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드는 말들



혐오 표현은 HIV 감염인에게 상당한 고통을 일으킨다. HIV/에이즈 감염인 단체 ‘러브포원’이 20~30대 HIV 감염인 198명에게 설문조사해 2018년 5월 발행한 보고서 ‘HIV/에이즈에 대한 20대~30대 HIV 감염인의 인식 조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 걸려 죽는다’라는 내용의 피켓이나 현수막, 댓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197명 중 34명(17.3%)은 이렇게 답했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힘이 든다.” 동성애가 아니라 혐오 표현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HIV 감염인들은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그런 발언을 듣거나 보면 화가 나고 속상한 감정이 든다.”(147명, 74.6%) “가능한 한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한다.”(100명, 50.8%) “그런 표현을 하는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70명, 35.5%)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33명, 16.8%)

혐오 표현은 HIV 감염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소주씨는 “퀴어축제에 아예 못 오는 분이 많고, 오더라도 감염인 커뮤니티에 아는 척을 못하는 분도 많다”고 했다. 성소수자이자 HIV 감염인인 후니(가명)씨는 대구에 살면서 대구퀴어축제에 참여한 적이 없다. 그는 “반대 시위하는 사람들이 축제장 주변 곳곳에 있어서 가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그러한데도 일부 HIV 감염인은 광장으로 나온다. 보리(가명)씨는 “혐오 표현이 불쾌하고 어이없긴 하지만,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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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퀴어축제에서 ‘알’과 ‘행성인’ 회원들은 퀴어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이즈 예방법) 제19조 폐지 캠페인을 했다. 이는 ‘전파매개행위금지’ 조항으로 감염인이 ‘HIV 전파를 하는 행위’를 하면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 실제 ‘콘돔 없는 성행위’로 고소를 당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감염인들도 있다. 성접촉 전에 상대에게 자신이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혔더라도, 상대가 감염이 되지 않았더라도 처벌 받을 수 있다.

회원들은 이 조항이 실제 감염 예방 효과가 없으며, 감염인에게 사회적 낙인을 강화해 오히려 예방에 방해가 된다고 설명했다. 공적 영역에서 맡아야 할 HIV 예방의 부담을 감염인들에게 떠넘기고 이들을 범죄화하는 악법이라는 설명이다. 감염인이라도 치료만 꾸준히 받으면 HIV가 몸에서 검출되지 않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상태에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없다. HIV를 타인에게 감염시키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HIV에 감염됐는지 모르는 이들이다. 실제 HIV를 예방하기 위해선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낙인을 없애 HIV 조기검진 및 안전한 성관계를 유도하는 게 효과적이다.

부스는 하루 종일 분주했다. HIV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람, 포스트잇에 응원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 ‘에이즈’ 낙인 도장을 손에 찍어보는 사람 등이 줄을 이었다. 부스에서 에이즈 예방법 제19조에 관해 들은 조조(가명)씨와 지지(가명)씨는 “HIV 감염인이 꾸준히 치료받으면 에이즈 활성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부스에서 설명하던 ‘알’의 회원은 “치료받으면 혈액 속에 바이러스가 사라져 성관계를 맺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면 대부분 ‘진짜요?’라면서 놀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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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에 마련해놓은 ‘한마디 손편지’에는 다른 퀴어축제 참가자들이 남긴 포스트잇이 가득 붙었다.

“질병은 죄가 아니야.” “나, 나의 동료, 친구, 애인! 감염인을 걸고넘어지지 마라!” “당신의 잘못이 전혀 아니니까, 우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우리는 함께할 거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가 가진 어떤 특성도 너를 막고 괴롭힐 근거는 될 수 없어. 지속적인 치료만 받으면 되는 그깟 만성질환 따위는 더더욱.”

단순 예방·관리 담론을 넘어서



퀴어축제장에서 만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김기환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HIV 이슈를 전면에 내세워 대응하지는 않았어요. 사회적 낙인이 심각한 상황에 동성애·HIV 두 가지를 함께 대응하는 것에 부담도 있었고, 준비도 잘 안 돼 있었어요. 지금은 좀 바뀌었어요. 우리 커뮤니티 안에 감염인 회원들이 있어요. 얼마 전 ‘친구사이’ 운영위원들과 HIV를 주제로 이야기했는데, 단순 예방·관리 중심의 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어요. 이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이야기해야 할 때예요.”

글·사진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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