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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특허무효율 높은 韓…툭하면 무효소송 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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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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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설립된 전자부품 벤처기업 A사는 오랜 연구개발 끝에 2011년 전력용 반도체 부품 자동생산 제조 기술 특허를 받았다. 이 특허를 가지고 1억여 원을 투자받아 제품 생산과 대기업 납품 등을 추진하던 중 경쟁 업체가 해당 특허에 대해 무효심판을 제기했다. A사 특허가 기존 특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6년간 특허에 대한 무효심판 소송이 이어졌다. 결국 특허 권리 중 극히 일부가 무효 처리되긴 했지만 기술의 핵심인 제조 방법에 대한 특허는 유효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A사는 "특허 중 극히 일부만 무효가 된 것에서 보듯 경쟁사가 말도 안 되는 특허소송을 제기했다"며 억울해하고 있다. A사는 특허 분쟁으로 비용 3억원과 6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탓에 외국시장 진출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에서 기술력을 기반으로 시장에 진입한 신생 업체들이 사업화 과정에서 잠재적인 경쟁자의 진입을 막기 위한 기존 업체들의 무분별한 특허소송에 휘말리는 사례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국내 특허무효율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어서 일단 특허소송을 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설사 제기한 특허소송에서 지더라도 수년간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경쟁사의 시장 진입을 늦출 수 있는 효과를 노리는 사례도 많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에서 지식재산(IP) 펀드 조성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사업 초기 중소·벤처기업을 향한 무분별한 특허소송이 IP펀드 활성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IP펀드란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재산권을 토대로 금융 지원을 하는 펀드를 말한다. IP를 활용해 중소·중견·벤처 기업에 자금을 투자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금융기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허심판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4~2018년) 벤처·중소기업이 특허를 등록한 뒤 3~5년 사이에 특허 무효심판이 청구된 횟수가 182건에 달한다. 국내에서 창업한 기업이 3~7년 뒤 생존할 확률이 30%에 불과한 상황에서 특허 분쟁은 신생 기업의 부담을 키워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특허 기술에 대해 경쟁 업체들이 무효심판 등 특허 분쟁을 들이대는 것은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높아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특허무효율은 40~50%에 달한다. 지난해 특허무효율은 45.6%였다. 특허 무효 심판에서 두 건 중 한 건은 특허 무효가 된다는 얘기다. 2017년 기준으로 미국과 일본의 특허무효율은 각각 24.4%, 21%로 우리나라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높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특허 자체 품질이 낮은 것도 있지만 소수의 특허 심판 인력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심판사건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2017년 현재 연간 한국의 특허심판관 1인당 처리건수는 72건으로 일본(33건), 미국(48건), 유럽(16건) 등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다.

이와 관련해 남호현 지식재산포럼(IPF) 회장은 "막대한 투자로 개발한 기술을 특허로 등록하더라도 특허 명세서가 부실하게 작성돼 경쟁사가 쉽게 특허를 우회하거나 특허무효소송을 통해 무효화해 기술을 탈취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특허 등록도 중요하지만 특허 침해 소송 대리권을 특허 전문가인 변리사에게 부여하는 등 권리 보호에 초점을 맞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또 외국 기술을 베껴 특허 출원을 했던 과거 산업화 시기와 달리 이제는 국내 특허 대부분이 국내 기업에서 나오는 상황에 맞게 가급적이면 특허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실제로 주요국들은 특허무효 심판 규정을 특허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한편 특허 무효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고치고 있다. 일본은 미국 판례를 받아들여 무효 증거로 제시된 여러 기술의 단순 조합만으로는 무효 결정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중국은 특허 재심사와 무효심판 과정에 대한 모니터링과 관리를 강화하고 있고 유럽은 심판관 1인당 처리하는 소송 건수와 심판 대기 물량을 줄이기 위해 내년까지 기술직 심판 인력 39명을 증원하기로 했다.

박성준 특허심판원장은 "특허를 보유한 벤처·중소기업이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하려면 특허 신뢰성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특허 신뢰성 제고라는 관점에서 증거에 기반한 판단 실무 강화, 심판인력·합의체 구조개편 등을 통해 체계적인 심판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호섭 기자 /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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